김씨일가의 숙청역사-박헌영 숙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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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살벌한 숙청으로 시작된 북한의 김씨 왕족의 숙청정치는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김일성에 의해 미국의 고정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박헌영의 처형과정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극동군 88저격여단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광복되어 한 달이 지난 1945년 9월 19일에 소련군함 푸카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입항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원산항에 입항하기 전 이미 국내에는 공산당이 창당되어 있었습니다.

해방되고 5일이 지난 1945년 8월 20일 서울에서 박헌영은 일제시기에 함께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였던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11일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던 것입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총비서가 되었고 당시 우리나라에는 남북을 통틀어 서울에서 창당된 조선공산당이 유일한 정당이었습니다. 평양에서도 소련파 공산주의자였던 김용범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내왔습니다. 당시 박헌영은 북조선분국이 서울중앙의 지도를 받는 조건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승인하였습니다.

김용범은 평안남도 안주군 태생으로 1922년에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다가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1930년 1월 국제공산당 원동아시아지부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고 1932년부터 평양과 경성, 흥남 등지에서 지하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평양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고 광복이 되자 석방되어 소련공산당에 제의하여 북조선분국을 책임진 총비서로 선출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당시 김일성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던 김용범은 생소하겠지만, 그의부인인 초대 북한 여성동맹위원장이었던 박정애에 대해서는 잘 아실거라고 봅니다. 김용범 제1비서가 1946년 8월에 위암에 걸려 사망하자 소련공산당은 김일성을 북조선공산당의 실권자로 선임하게 됩니다. 김용범의 사망으로 김일성은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과 소련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북조선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46년 8월 말에 북조선공산당 분국과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창건절이라고 하는 1945년 10월 10일은 김용범을 위시로 하는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이었던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김용범이 조선로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1비서로, 오기섭과 무정이 제2비서로 선임되었지만 김일성은 대회 집행자의 한사람일 뿐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초에 박헌영과 김일성은 개성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상관의 위치에 놓여있었습니다. 소련군대 대위에 불과한 김일성이 소련군함을 타고 원산항에 입항한 지 한 달도 안 되었고 북한주민들도 그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고 반면에 박헌영은 남북한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946년에 접어들면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비합법적인 정당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점차 위축되었고 김일성이 이끄는 북조선분국은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도 바꾸었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 서울중앙의 제1비서인 박헌영의 감독과 지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창당된 남조선로동당의 공산주의 활동이 비법화되면서 위축되어갔지만 서울중앙의 지시를 받았던 북조선분국은 소련공산당의 정치적인 지지와 군사적인 지원으로 장성 강화되었습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 제1비서였던 김용범이 위암으로 사망하고 소련공산당은 김일성을 소련의 앞잡이로 내세워 그를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내밀어 주었습니다.

서울에서 창당된 조선공산당을 남북한을 대표하는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주장하였던 박헌영도 소련공산당이 김일성을 지지하자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하는데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소련공산당을 등에 업고 자기의 공산주의 선배인 박헌영을 자기의 수하에 두게 되면서 김일성은 박헌영에 대해 그의 직함을 무시하고 ‘이론가선생’이라는 대명사로 그를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박헌영은 남조선에서 수배령이 내려졌고 더 이상 공산주의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자 1948년 4월 이후로는 북한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부수상 겸 외상으로 취임되었습니다. 결국 1949년 6월 24일에 남조선로동당은 북조선로동당에 흡수되었습니다. 1949년 6월 30일에 합당한 당의 명칭을 ‘조선로동당’으로 개명하면서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박헌영은 부위원장으로,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은 비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의 의장에는 김일성, 부의장에는 박헌영, 위원으로 김책, 박일우, 허가이, 리승엽, 김삼룡, 김두봉, 허헌이 선출되었습니다.

김일성은 국내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신망이 높았고 특히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박헌영을 소련공산당의 힘을 빌려 자기의 부하인 부위원장직에 앉히고는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낼 때도 공동명의로 서명하였고 6.25 남침전쟁을 의논하기 위해 스탈린을 만나러 모스크바에도 함께 갔습니다.

박헌영의 가장 큰 착오는 김일성과 함께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공산당 총비서였던 스탈린을 만나 6.25 남침전쟁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기반과 지지세력이 북한보다 남한에 더 많았던 박헌영은 남북한이 통일되면 자기가 김일성보다 공산당지도자로서는 더 위세를 떨칠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신라시대 왕족의 후예이고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은 빈농이자 남의 묘를 봐주는 묘지기에 불과했던 김일성보다 족벌도 높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하여 학벌도 비할 바 없이 좋았습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내려가면 20만 명의 남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지하에서 나와서 호응할 것’이라며 전쟁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1949년 6월 미국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남한에서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들을 전부 철수시키자 1950년 3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려고 또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접견하였습니다. 전쟁승인을 받고 무기를 원조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스탈린은 240여대의 땅크(탱크)를 포함한 전쟁무기들을 김일성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전쟁을 승인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1950년 4월까지 약 5만여 명의 중국공산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을 귀국시켰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김일성의 지시로 38선 전역에 걸친 남침전쟁이 개시되었고 3일 만에 인민군은 서울을 해방하였습니다. 청취자여러분들은 북한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배우는 6.25남침전쟁은 결국 조선반도 전체를 공산국가로 만들어 통치하려던 김일성과 남한의 공산세력이 부활하면 자기의 정치권력을 다시 회복하려던 박헌영의 정치적인 허영심이 불러온 민족의 대재난이었습니다.

박헌영이 인민군이 남한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어난다고 하였던 백만의 남조선 공산당원들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배우면서 미군과 남조선군대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어떻게 3일 만에 오히려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되었는지 의문이 났었는데 대한민국에 와서야 김일성이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고 박헌영의 남로당 봉기설도 전쟁발발 요인의 하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헌영이 말한 그 봉기설을 믿고 김일성은 서울을 강점하고도 남으로 더 진격하지 않고 3일 동안 서울에 머물었던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박헌영이 자기가 바라던 전쟁으로 인해 김일성에게서 큰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숙청된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약속하면서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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