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말로(6) - 유고슬라비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Photo courtesy of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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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과 친분이 두터웠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53년부터 1980년까지 근 28년 동안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한 독재자입니다. 북한 청취자 여러분들은 1975년 6월에 김일성이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2년 뒤인 1977년 8월에는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북한을 답방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1975년 당시 북한을 방문한 티토는 84살의 고령이었으나 너무도 젊어보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티토가 1980년 88세의 나이로 병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의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산당 일당독재와 감시체계에 의한 주민통제, 반대파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티토 대통령이 사망한 후 1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에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는 분열되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로 분리·독립되었습니다. 티토가 권력을 행사할 때까지만 해도 붕괴되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그가 사망하고 나서 분열된 것만 봐도 티토가 공권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는지 잘 말해줍니다.

티토는 1892년 5월 7일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한 나라였던 크로아티아공화국의 쿰로베츠라고 불리는 농촌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의 여덟 번째 자식으로 출생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티토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해야 했습니다. 18살 되던 1910년에 티토는 고향인 시골마을을 떠나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에 있는 철강공장에서 철강노동자로 일하였고 20살 되던 1912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여성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21살에 군에 징집되어 군복무를 시작한 티토는 입대한 지 1년 뒤에 발발한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2년 동안의 러시아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25살이 되던 1917년에 펠라기야 벨로우소바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티토는 고향에 돌아와 공산당에 입당했고 32살 나던 1924년에는 공산당 지구당 간부로 선출되었습니다.

3년 뒤인 1928년 2월에 자그레브지역 공산당비서로 선출되어 그해 5월에 진행된 국제노동절 행사를 주도한 이유로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출옥 후에도 가명을 쓰면서 국제공산당 소속의 발칸지역 담당 서기국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세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루치아 바우어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서기를 지내던 불가리아인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추천으로 45살 이 되던 1937년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임시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뒤인 1940년 10월에는 전당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해, 전후 유고슬라비아에서 주도권을 잡은 티토는 군사재판도 없이 반대파 군인 약 2만 3천여 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 몰래 소련 대사관과 접촉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헤브랑과 주요비치를 비밀경찰을 시켜 체포하였습니다. 전후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되었지만 중립국가를 선포한 티토는 개방을 주장하면서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해서는 비밀경찰들을 동원해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동유럽 국가들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 대상은 티토와 국가 체제 변혁이 아니라 특혜를 받는 특권층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연방 소속의 크로아티아공화국 내 지식인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자유화 운동이 확산되자 티토는 그해 12월 자유화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공산독재를 실시하면서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유지해왔던 티토는 80고령으로 접어들면서 자신이 죽고 나서 연방 내 여러 국가들이 분리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강구했습니다.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무기한 대통령제를 내세웠던 티토는 1974년 ‘신헌법’을 채택하면서 연방정부가 6개의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며, 각 공화국의 독립성과 자주성, 상호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받도록 했습니다.

비동맹국가운동(블럭불가담운동)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3세계 나라들의 단결과 협조를 위해 국제적인 정치 리더십을 발휘하던 티토에 대해 매력을 느낀 사람이 김일성이었죠. 80고령의 티토로부터 이 운동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기를 바랬던 김일성은 1970년대에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블럭불가담 가입국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자기의 입지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가맹국이었던 슬로베니아공화국에는 김일성이 1975년 6월에 티토를 만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면서 머물렀던 빌라 블레드(Vila Bled) 별장이 있습니다. 당시는 티토의 개인별장이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고급호텔로 이용되면서 전 세계의 유명한 배우들과 정치인들, 유명인사들이 이 별장을 다녀갔고 그들이 남긴 친필 방명록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을 수행하여 유고슬라비아에 갔던 김정일은 티토의 개인 별장인 빌라 블레드에서 영감을 받아 돌아온 후에 북한 전역에 김일성과 자신의 별장들을 건설하도록 했습니다. 김정일이 알프스 산맥에 위치해 있으면서 블레드 호숫가에 위치한 별장을 보면서 이를 흉내내서 만든 별장이 북한의 삼지연별장입니다.

지금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도 1975년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나서 건설을 시작해 1977년에 완공된 김일성의 별장으로 북한주민들은 주석궁전이라고 불렀죠. 그리고 김일성은 1977년에 티토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이 주석궁전에서 맞이했던 것입니다.

1980년 티토가 병으로 사망하자 김일성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로 갔는데 당시의 동영상자료들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습니다. 티토가 사망하고 나서 독재의 구심점이 없어진 유고슬라비아 가맹국들 사이에 분쟁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각각 독립을 하여 지금은 서로 다른 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한 독립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분쟁으로 30만여 명이 희생되었고 일부 시민들은 티토를 ‘공산주의 도살자’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가맹국들에 세워졌던 티토의 동상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티토에 대해 독재자라고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과 비교하면 그래도 좀 더 나은 독재자라고 주장합니다. 그 논거를 요약해보면 티토는 자신의 직접 빨치산을 이끌고 파쇼 독일의 침공을 물리쳤으나 김일성은 러시아 군에 복무하면서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직접적인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티토는 자신만의 정치철학으로 발칸반도의 통합과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했지만, 김일성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앞잡이로서 소련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에 순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티토는 다민족 연방국가 건설을 위해 독재를 실시했지만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민족의 원흉이며 티토는 후계세습을 하지 않은데 비해 김일성은 3대에 걸려 낡은 시대의 세습독재로 북한주민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살인적인 폭정과 독재로 김씨 왕족 세습독재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언젠가는 참고 참았던 북한 주민들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