쁠럭불가담운동과 반둥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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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쁠럭불가담운동이 시작된 계기라고 할 수 있는 반둥회의와 북한당국의 대응, 정책변화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40년대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1950년 조선반도에서 남북한군과 중국, 소련, 미국 등 20여 개국의 군대가 참전한 6.25전쟁으로 전 세계는 극심한 냉전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왔고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에서 반둥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쁠럭불가담운동 창시자의 한사람인 인도 초대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1953년 2월에 평화지역을 설정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3지역론’을 주창했습니다. 그리고 1954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체결된 중국과 인도 사이 통상 및 교류협정에서 ‘평화공존 5원칙’이 제시되었고, 그해 6월 인도를 방문한 중국 주은래총리에게 인도 네루 수상은 해외 군사기지로부터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공격이나 간섭이 없는 ‘평화지대’를 아시아에 건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중국 주은래 총리도 이 ‘평화공존’정책을 지지하는 ‘평화공존 5원칙’을 내놓았습니다. 평화공존 5원칙의 내용은 첫째로 영토 보전과 주권의 상호존중, 둘째로 상호불침략, 셋째로 상호불간섭, 넷째로 평등과 상호이익, 다섯째로 평화공존입니다.

그리고 1954년 4월 28일∼5월 2일, 5일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는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5개국 회의가 열렸습니다. 콜롬보 회의에서는 당시 진행 중이던 인도차이나전쟁의 중지와 인도차이나 3국인 베트남, 캄보쟈(캄보디아), 라오스의 완전독립, 핵무기 사용금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승인, 식민주의 반대 등이 의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954년 12월에 콜롬보 회의 5개 참가국은 인도네시아에서 29개국의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초청국을 결정했습니다.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그 다음해 1955년 4월 반둥회의로 이어졌습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서쪽 반둥시에서 진행된 회의여서 반둥회의라고 불리는 이 국제회의에는 4개월 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진행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 참석했던 29개국 대표단이 참석했습니다. 1955년 4월 18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반둥회의에 참가한 국가들로는 중국, 인도, 일본, 애급(이집트), 필리핀, 알제리 등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개국이었습니다. 남북한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2년도 안된 상태여서 회의에 참석해 물의를 일으킬 것으로 보고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열강들의 군사동맹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군사동맹 사이의 냉전, 신식민지 재분활을 둘러싼 민족해방운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서서히 비군사동맹국들의 국제기구인 쁠럭불가담운동은 이렇게 막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평화10원칙'을 일명 '반둥10원칙'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원칙의 내용은 '기본적 인권과 국제연합헌장의 목적 및 원칙의 존중, 주권과 영토 보전의 존중, 인종 및 국가 사이의 평등, 내정 불간섭, 국제 연합 헌장에 입각한 개별적 및 집단적 자위권의 존중, 대국의 이익을 위한 집단적 군사동맹 불참, 상호 불가침, 평화적 방법을 통한 국제 분쟁 해결, 상호 협력의 촉진, 정의와 국제 의무존중 등입니다.

반둥회의는 비동맹과 중립주의, 상호 협력 등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을 위한 국제회의로서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의한 냉전이 지속되던 당시에 국제 정치무대에 '제3세계'라는 새로운 국제연합세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둥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북한당국은 개별적인 나라들과의 협조관계를 개설하거나 유지하는데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당국은 김일성이 쁠럭불가담운동의 지도자인듯이 언론출판물들을 통해 선전해왔지만 보시는 것처럼 당시 북한은 반둥회의에 초청받지도 못했고 국제사회에서 모서리(왕따)를 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북한당국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도 뉴델리에서 인도·북한 친선협회가 창설되었습니다. 반둥회의에는 비록 대표단을 파견할 수 없었지만 북한당국은 쁠럭불가담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언젠가는 초대되어 가입국으로 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은 1956년 4월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3차대회 보고에서 반둥회의에 대해 ‘식민주의를 반대하여 공고한 평화를 지향하는 수억 만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들의 일치한 염원을 표명하였으며 유명한 5개 원칙에 입각한 이 지역 인민들의 단결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구라파와 아시아의 사회주의 및 비사회주의 평화애호국가들을 망라하는 광대한 평화 지대가 형성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말한 평화지대는 인도 네루 수상이 표현한 어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비록 반둥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인도네시아, 인도, 버마와 무역협정을 체결하였고 그 나라들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1958년과 1959년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와 각각 문화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1958년에는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알제리 임시정부와 아프리카 기네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찌또(티토)를 쁠럭불가담운동의 지도자라고 선전하고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찌또 대통령이 쁠럭불가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반둥회의 이후 5년이 지난 1960년대 초엽부터였습니다. 1960년 유엔 제15차 총회에서 찌또 대통령은 에급의 나세르 대통령과 인도 네루 수상,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가나 은크루마 대통령과 국제적인 긴장완화를 위해 미국과 소련 간의 정상회담을 요청하는 결의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1961년 초에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순방하고 나서 1961년 6월 5일부터 9일간 애급이 수도 까히라(카이로)에서 22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회의를 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찌또 대통령, 인도 네루 수상,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애급 나세르 대통령의 노력으로 1961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6일간 유고슬로비아 베오그라드에서는 2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쁠럭불가담국가 수뇌자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소련의 군사기술지원과 안보협력관계에 있었던 북한은 쁠럭불가담운동에 직접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군사동맹인 와르샤와 조약기구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정책을 실시하였던 찌또가 주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쁠럭불가담운동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소갈등을 통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경쟁적인 줄타기 외교로 대북원조와 우대 차관 등의 재미를 본 김일성은 그때부터 사회주의 국가들뿐아니라 서방자본주의 나라들과 제3세계 나라들로 부터도 정치적 동정과 경제적 지원을 꾀하면서 쁠럭불가담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1965년에 반둥회의 1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이 행사에 참가하고 있던 중국, 캄보쟈 등 참가국 정부수반들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후 북한당국은 1975년 8월에 뻬루(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진행된 제2차 쁠럭불가담운동 가입국 외상회의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 회원국 정부수반들을 북한에 끌어들여 북한주민들에게 김일성이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것처럼 ‘세계인민의 현명한 지도자’라는 선전선동으로 우상화를 극대화했고 당시 외부정보를 알 수 없었던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을 세계혁명의 수령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