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들에 냉전시기 공산독재자로 군림하다가 최후를 마친 동유럽나라 국가지도자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몇 시간에 걸쳐 아프리카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과의 갈등을 빚으면서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던 블럭불가담 국가들, 소위 ‘제3세계나라’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1962년 3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소련공산당의 정책을 수정주의로 매도하였다가 오히려 갈등만 빚게 되었고 1967년 중국공산당이 강행한 문화대혁명을 폭력주의로 비판하다가 중국당국의 맹비난을 받기도 했죠.
구소련과 중국의 원조와 차관으로 경제를 유지하던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이 두 나라의 지원을 바랄 수 없게 되자 김일성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등 신생독립국가들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방송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짐바브웨는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으로 잘 알려진 나라입니다.
북한에서 이 방송을 들으시는 청취자 여러분들은 <아프리카의 김일성>이라고 불릴 만큼 북한과 인연이 깊었던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에 대해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이었던 로버트 무가베는 1980년에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접견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저는 김일성과 로버트 무가베의 연도환영행사에 참가했었고 지금도 당시 행사에 참가해서 ‘환영 무가베!’를 외치던 일이 엊그제 일 같이 눈에 삼삼히 떠오릅니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식 현대판 왕족 독재국가체제를 부러워했던 로버트 무가베는 귀국하여 짐바브웨를 북한 같은 독재국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짐바브웨 전 대통령이었던 독재자 무가베는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처형과 언론탄압, 중세기적인 고문 등으로 무소불위의 독재를 일삼던 살인독재자입니다.
그는 1980년부터 37년 동안이나 짐바브웨 국민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면서 살벌한 정치권력을 행사했지만 2017년에는 짐바브웨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가택연금에 이어 해외에서 사망하면서 독재자의 종말을 마쳤습니다.
1924년 짐바브웨 수도인 하라레에서 서쪽으로 약 150리 떨어진 시골마을인 쿠타마의 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무가베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에 현혹되었고 영국 식민지였던 짐바브웨를 독립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렸습니다. 당시 짐바브웨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소련과 중국,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북한에서도 지원했습니다.
1979년 짐바브웨는 독립하였고 1980년에 로버트 무가베는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평양을 방문하여 독재자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진 북한의 통치제제를 보면서 공산독재권력을 지향하게 되었고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의 잔인한 고문정치가 중세기적인 고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짐바브웨 고문’이라는 영어 글자인 ‘짐바브웨 토처(zimbabwe torture)를 검색하면 무가베 시대에 짐바브웨 주민들이 고문당한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 집단구타, 몽둥이 매질 등 다양한 고문으로 사람들은 과다출혈과 괴사, 척추 골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1980년 북한을 방문한 무가베는 김일성에게 군사교관을 보내줄 것을 간청했고 북한에서는 짐바브웨에 106명의 군사교관을 보내주었습니다. 짐바브웨에 파견된 북한 군사교관들은 짐바브웨 제5여단의 약 5천여 명에게 태권도와 격술을 배워주었습니다.
1983년 1월부터 3개월간 감행된 구쿠라훈디 학살사건은 북한의 무기지원과 군사교관들로부터 훈련받은 짐바브웨 군인들이 은데벨레 부족주민 2만여 명을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 이 부족 주민들이 대량학살된 이유는 그들이 무가베 반대파 지도자를 지지했다는 것이었죠.
무가베는 당시 북한 김정일에게 제5여단 군인들의 훈련을 위해 군사교관들을 요청했고 북한 군사교관들로부터 훈련된 제5여단 군인들이 이 학살사건에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로버트 무가베의 반대파 지도자인 응코모를 쿠데타 협의로 체포하면서 벌어진 짐바브웨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타벨레랜드 지역주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이 지역의 촐로초, 루파네, 응카이 등지에 파견되어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무가베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시위에 참가했던 민간인들을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교회건물들에 강제로 가두어 불태워 죽였습니다,
짐바브웨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에 언론인들과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암살도 서슴없이 감행했습니다. 무가베의 독재를 반대하였던 짐바브웨의 언론인인 이타이 자마라는 강제로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무가베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던 에드워드 친도리 치닝가는 운전 중에 암살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전우인 솔로몬 무주루도 정치적인 적수로 간주하고 괴한들을 시켜 총으로 쏴죽이게 하고는 집에 불을 질러 시체마저 훼손하였죠.
2011년 2월 19일에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의 한 모임에서 2010년 12월에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인 ‘아랍의 봄’ 에 관해 토론했다는 이유로 참석자 45명을 투옥하였으며 무자비한 고문을 강행했습니다. 당시 고문으로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음팟시는 사망하였습니다.
짐바브웨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독립 후 1년만인 1980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과의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되기 전까지 8차례나 북한을 방문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독재방식을 배웠습니다.
무가베는 짐바브웨 고위 각료들에게 김일성의 노작들을 읽도록 지시했고 북한식 우상화선전을 짐바브웨에도 도입했습니다.
무가베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숭배를 위해 생일날을 국경절로 정하게 했으며 도처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되자 2010년 5월에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한지국립공원(Hwange National Park)에서 새끼 코끼리와 코뿔소, 기린, 얼룩말(줄말) 등 야생동물 한 쌍씩 잡아 전통적 우방인 북한에 선물로 보냈습니다. 무가베 대통령의 이 선물을 두고 국제사회는 같은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한 무가베의 애정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통치에 대한 흠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김정일이 북한의 곳곳에 별장을 지은 것을 본 따 2008년에 무가베는 2600만 달러를 들여 수도 하라레 근교에 5번째 별장을 지어 ‘가난한 거지국가 짐바브웨’ 독재자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최악의 가뭄으로 수백만 명의 짐바브웨 국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자기의 생일 92돌을 맞으며 92kg짜리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2017년에 자기보다 41살 연하인 후처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했다가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퇴출되었습니다.
무가베는 가택연금되었고 그해 11월 21일 사임한 무가베는 그 다음해에 치료를 이유로 싱가포르에 머물다가 2019년 9월 6일 타향에서 사망했습니다. 독재자 무가베의 사망소식을 접한 짐바브웨 국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 동안 축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듯 독재자들의 처참한 운명은 인종이 따로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