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클린턴 정부의 대북지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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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고난의 행군시기 미국에서 북한주민들에게 보내준 강냉이쌀을 못 먹어본 분이 없을 것입니다. 40KG씩 포장된 마대에는 미국 국호인 아메리카라는 글자와 영어로 USA가 새겨져 있어 북한주민들은 강냉이가 미국에서 보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원조를 받으면 정치적인 요구조건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왔지만 고난의 행군시기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자 미국에게도 구걸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제공한 대북지원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인도주의적인 식량지원으로 미국의 대북 전체 지원에 57%에 달합니다. 미국의 대북지원 첫 해인 1995년에 제공한 지원규모를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달러에 달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체제붕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핵무기 완성에 주력했으며 여기에 국가예산의 많은 몫을 탕진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단절되고 무리한 국방비 예산으로 국민들의 삶은 더 궁핍해졌으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그 다음해인 1995년부터는 북한 전역에서 굶주림으로 죽는 주민들이 늘어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목숨보다 권력을 방패로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김정일에게는 국가붕괴를 막기 위한 핵무기 완성이 더 중요했습니다. 1989년 미국 정찰위성이 북한의 영변 원자력연구소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발견하고 국제원자력기구를 통해 사찰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1993년 북한당국은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자 미국과 북한 간에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긴장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원해 북한의 핵시설을 타격할 작전계획도 세웠습니다. 1993년 5월 27일에 북한당국은 유엔대표부를 통해 북미 고위급회담에 관련해 미국정부에 요청을 했고 6월 2일부터 11일까지 10일간 제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이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6일간 제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이 제네바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그 다음해인 1994년 6월 13일에 국제원자력기구에서 탈퇴하면서 또다시 조선반도는 전쟁이 언제 촉발될 지 모를 전운이 감돌았고 1994년 6월 15일에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북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강연회에서 ‘급해맞은 미국정부가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보내 김일성에게 미국과 북한이 서로 잘 지내자고 구걸하려고 했었다’고 강연자들이 설명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집필해서 출간한 그의 자서전 <백악관을 넘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90년부터 방북을 권유했고 북핵위기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그는 ‘미 정부의 허가와 상관없이 방북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당국은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지 사흘째 되던 6월 17일 김일성과 요트를 타면서 회담하는 장면을 담은 기록영화를 전 국민들에게 의무적으로 시청하도록 하였고 그에 대한 설명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의 위대성에 감탄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카터와 만났던 김일성은 20일이 지난 7월 8일에 묘향산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김일성의 급사로 북한 내부는 대 혼란에 빠졌고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압박이 더 강해질 것을 타산한 김정일은 그해 10월 21일 미국과 국제사회가 경수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주는 조건으로 흑연감속로 및 관련 핵시설 동결, 경수로 완공 시 핵시설 해체, 2003년까지 1천M와트의 경수로 2기 완공 등을 약속하는 제네바 합의서를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경수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매년 중유 50만톤을 북한에 제공한다는 약속도 합의문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1월 15일에 미국정부는 합의서에서 약속한 중유제공을 개시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95년 여름은 북한당국과 주민들에게는 가장 엄혹한 시련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은 대북지원의 시작된 해로 북한이 자신의 식량난을 국제사회에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한 의미 있는 연도였습니다. 당시 미국정부는 북핵 문제로 북한과 대립과 대화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긴급 구호요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20여 일간 몰아친 장마비로 농경지들이 물에 잠기고 살림집들이 홍수에 떠내려갔습니다. 1995년 8월 29일부터 9월 9일까지 유엔 긴급조정팀이 북한 수해지역을 조사했습니다. 이것은 북한정권이 수립되어 국제기구가 처음으로 공식 실시한 식량난 및 배급현황조사였습니다.

수해피해로 농작물들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고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습니다. 북한당국은 뉴욕주재 북한 유엔대표부를 통해 유엔 인도지원국에 대북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규모가 140억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1995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국제사회가 북한에 제공한 지원액 7억 9090만 달러 중에 미국 클린턴 정부가 지원한 액수는 4억 1656만 달러로 전체 지원액수의 55%를 차지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이 액수가 얼마나 많은 지 가늠가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새 승용차 1대 가격이 약 3만 달러입니다. 그러니 미국정부가 클린턴 정부시기에 지원한 대북지원액으로 새 승용차를 산다면 1만 4천여 대를 살 수 있습니다.

지난시기 중국이나 구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액수와 비교해도 더 많은 액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이나 구소련은 1950년대 말 이후로는 무상원조가 아닌 차관으로 북한에 지원물자를 제공했지만 미국은 모든 원조를 무상으로 제공했습니다.

미국정부가 북한에 제공한 긴급지원은 주로 쌀, 옥수수, 콩 등 식량지원이 기본을 이루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식량지원이 안보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1997년부터 1999년 사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남북한과 중국을 포함한 4자간 안보회담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을 제공했고 1999년 지원된 50만 톤이 넘는 식량지원은 금창리 지하 핵개발 의혹 시설 조사허용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금창리 지하핵시설에 대한 의혹제기는 1998년 8월 17일 뉴욕타임즈에 의해 발생되었습니다. 미국정부는 1998년 5월 18일부터 5월 24일까지 금창리 1차 방문을 통해 핵과 무관한 시설로 판명하고 그해 11월에 제1차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관련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3월 16일 금창리 지하시설 시찰 후 식량지원을 약속했습니다.

1999년 한 해 동안에 미국정부가 북한에 제공한 지원액수 3억 1100만달러 중 2억 4천 6백만 달러가 식량지원이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기반으로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북한당국은 한편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빙자한 구걸외교를 진행했습니다.

미국정부는 북핵문제해결에서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통한 핵에네르기의 평화적인 이용을 주장했지만 김정일의 머릿속에는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는 어느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북한당국이 미국을 승냥이에 비유하면서 철천지 원수라고 강조하지만 미국은 북한주민들이 굶어죽고 국가가 붕괴에 직면하자 가장 많은 지원액을 제공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클린턴 대통령 집권 이후 새로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부시 대통령 시기의 미국정부의 대북지원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