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말로(9) - 콩고민주공화국 모부투 세세 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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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북한체제를 모방해 32년 동안 독재를 해오다가 해외로 망명해 타향에서 죽음을 맞았던 콩고민주공화국(전 자이르공화국)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모부투가 1930년에 태어날 당시 콩고민주공화국은 벨기에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모부투가 태어나자 부모들은 ‘조세프 데지레 모부투(Joseph-Désiré Mobutu)’라는 유럽식 이름을 달아주었습니다. 모부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브뤼셀에서 유학을 마친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벨기에 식민지시기에 군복무를 했던 모부투는 1960년 6월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되면서 건립된 연립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의 지지 하에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를 쿠데타로 숙청한 공로로 최고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모부투의 명령으로 루뭄바 총리를 체포한 군인들은 그를 콩고 남부의 카탕가에서 살해했습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모부투는 1965년 11월에 자기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조제프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해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5살이었죠. 모부투는 대통령에 즉위한 후 나라이름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개명했고 수도명도 프랑스어식의 레오폴드빌에서 킨샤사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식의 이름이었던 ‘조세프 데지레 모부투’를 아프리카식 이름인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응그벤두 와자방가’로 개명했습니다. 18자의 긴 이름의 뜻은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업적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고 합니다.

모부투는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년만인 1966년 4월에 새로운 정당인 ‘혁명대중운동’을 유일정당으로 선포하였고 자이르에 존재하던 50여개의 정당들을 해산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반민주적인 1당 독재의 시원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법률에 의하여 모든 시민들이 강제로 당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북한식 1당 독재가 모부투에 의해 아프리카에도 생겨난 셈이죠.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74년 12월 북한을 방문하면서 김일성을 두 번이나 직접 만나고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면서 자기 나라도 북한 같은 현대판 봉건왕조같은 독재국가를 만들 의지를 굳혔습니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김일성주의를 흉내낸 모부투주의를 국가의 공식이념으로 주입하도록 했고 수도와 지방도시의 거리들에는 독재자 모부투의 대형 초상화들이 즐비하게 나붙었죠.

선전매체들을 동원해 북한에서 김일성의 이름에 붙인 존칭어처럼 자기의 이름 앞에도 다양한 경어들을 붙이게 했습니다. 모부투의 이름 앞에 붙었던 대표적인 경어로는 ‘자이르 혁명의 안내자’, ‘국가의 아버지’, ‘창립 대통령’ 등이었습니다.

모부투 세세 세코는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았던 집단체조를 보고 이를 콩고민주공화국, 당시 자이르공화국에도 도입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모부투의 요청으로 1975년 2월 6일에 20명의 북한 집단체조대표단이 콩고에 집단체조를 전수해주었습니다. 김일성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북한같은 독재국가를 지향하는 모부투를 격려해준다는 의미로 그해 2월 20일에는 60명의 평양교예단 배우들을 콩고에 보내 수도 킨샤사와 지방 도시들에서 2주간 공연을 하도록 했습니다.

3월에는 모부투의 요청으로 경제대표단과 외교대표단, 군사대표단이 각각 콩고를 방문해 경제협력문제와 양국간 군사교류문제들에 대해 논의했죠. 그리고 1975년 11월에는 모부투 세세 세코의 요청으로 북한의 여성 군사교관 7명이 콩고민주공화국 여군 특수훈련소에서 400여 명의 훈련생들을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북한방문을 통해 주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 선전선동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모부투는 북한식 개인숭배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선동교육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출판물 첫 페이지에 자기의 초상화를 넣도록 했고 김일성의 현지지도를 모방해 콩고의 곳곳을 방문하여 ‘국민의 어버이’라는 모습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현지지도를 하면서 모부투는 머리에 표범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즐겨 썼는데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을 절대군주로 여기도록 하기 위한 우상화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돈에 환장하지 않은 독재자가 없고, 청렴결백한 독재자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이라 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호화로운 별장들을 지어놓고 진수성찬으로 저들의 배만 불렸고 독재체제의 영구적인 유지를 위해 독재의 하수인들에게 선물정치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는 것, 역시 잘 아시리라 봅니다.

모부투의 황금에 대한 욕심은 한계를 몰랐고 콩고는 국가 관료들마저 뇌물과 횡령을 일삼아 국민들만 가난한 삶에서 허덕여야만 했습니다.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북한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교류에서 독재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돈을 긁어모으기에는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교류가 절실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양면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결국 두 팔을 벌려 정치는 공산독재를, 경제지원을 위해 자본주의 서방국가들과 손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부투는 금, 동, 코발트 등 콩고에 매장량이 많은 광물자원들을 서방국가들에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측근들의 충성경쟁을 위한 선물정치를 위해 국고를 마구 탕진했습니다. 북한식의 국유화를 도입하여 공장과 지어 농촌들도 자기의 소유나 다름없는 국영기업으로 전환하였고 은행들에도 자기의 소유권을 확장했죠. 수도 킨샤사 은행의 가장 큰 주주가 모부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금권욕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레퍼드 뱅크(Leopard bank)’였는데 이것은 표범가죽모자를 쓰고 다니던 모부투를 조롱하는 영어식 표현이었죠.

정치방식은 북한의 왕족독재를 모방하고 경제방식은 대외기술교류를 통한 기술발전으로 성취하려는 모부투의 의지는 1982년 6월 자이르공화국 정부대표단의 한국 방문이 잘 보여줍니다. 모부투 세세 세코는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1982년 6월 7일부터 6월 10일까지 4일 동안 한국을 방문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장들과 농산물가공공장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과 포항제철소, 대규모의 농수산가공공장을 가진 CJ제일제당을 돌아보면서 한국의 발전상에 감탄했고 공군과 해군부대들의 훈련모습을 보면서 강력한 군사력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에 1당 독재를 멈추지 않고 북한식 전체주의로 콩고국민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독재자 모부투의 운명은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면서 공산화정책에 매달리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다당제를 통한 민주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들이 일어났습니다.

정치방식은 북한같은 독재를 희망하면서 한쪽으로는 공산국가들에 손을 내밀고, 다른 한손으로는 자본주의식 경제개발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 협력할 것처럼 양면전술에 매달렸던 모부투는 냉전종식과 함께 그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죠. 생전에 50억 달러의 재산을 모았던 모부투의 32년의 독재는 군인들의 쿠데타로 종말을 고하였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망명길에 오른 그는 1997년 9월에 콩고에서 직선거리로 약 1만 5천리나 떨어진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렇듯 독재자들의 운명은 항상 인민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것은 역사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김정은도 명심하라”고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