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말로(10) - 적도기니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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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독재자라고하면 해당 국가의 정치·경제·사법·국방 등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장기집권을 하는 국가지도자를 말합니다. 독재국가에서는 숙청과 처형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정치적 적수로부터의 암살 등 신변위험이 항시 존재합니다.

오늘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된 이후 초대대통령으로 역임했다가 사촌동생에 의해 처형당한 적도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의 기니공화국과 기니비사우공화국에 비해 적도에 가까이 위치한 나라여서 적도기니라는 국가명칭으로 불리는 적도기니공화국은 1968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적도기니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될 당시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1924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부모의 슬하가 아닌 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참가했던 프란시스코는 1968년 독립 후 적도기니의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확장을 위해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을 강행했습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사회주의들의 공산독재에 매혹된 프란시스코는 공산독재체제를 독립된 적도기니에도 도입했습니다. 적도기니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196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영원한 독재체제를 위한 숙청과 처형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 아는 1967년 갑산파 항일투사들에 대한 종파숙청이 바로 그것이죠.

프란시스코도 광범위한 권력 장악을 위해 북한 김일성의 숙청수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 중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대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습니다.

1968년부터 3년 동안의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숙청과 처형으로 지지기반을 넓힌 프란시스코는 헌법을 개정하여 법적으로 자기가 영구집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 독립되면서 발표되었던 1968년 제정헌법을 무효로 선포했던 것이죠. 이러한 조치로 적도기니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과 내각 구성권까지 모두 대통령인 프란시스코가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10월 18일에 반포한 법령에는 대통령이나 정부에 위협을 주는 인물은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였다고 하지만 더 무서운 독재가 적도기니 국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1972년 7월 14일에 다시 헌법을 개정하여 자신을 영구적인 종신 대통령으로 만든데 이어 1973년 7월 29일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과 그가 속한 정당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사교육을 폐지하고 교육을 국유화한 프란시스코에 의해 적도기니 학생들은 북한과 같은 지도자 우상화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일당독재의 선전선동에 외부정보가 차단된 채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헌법 개정을 북한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독립 후 1년 만인 1969년에 두 나라 사이에 맺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염두에 두고 나온 분석입니다.

북한에서 해방 후 김일성에 의해 모든 종교 활동이 폐지되고 목사들과 신부들이 북한당국의 탄압을 피해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피난을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북한주재 적도기니 대사관을 통해 북한의 독재통치수법을 익힌 프란시스코는 적도기니에서도 모든 종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시켰죠. 라디오와 언론들이 프란시스코의 수중에 장악되어 표현의 자유가 무참히 짓밟혔고 1973년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국민들의 해외여행마저 중단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원성이 커져갔고 정치인들과 사회활동가들이 비합법적인 반정부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북한 같은 독재국가를 원했던 그는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즉결처형을 강행했습니다.

1973년은 김정일에 의해 북한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이 제정, 발표되어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신조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시기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처형되던 때였습니다. 같은 해인 1973년에 적도기니에서도 프란시스코의 무시무시한 철권통치 아래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수천여 명이 숙청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러한 프란시스코의 독재행각에 대해 비난했고 국제사회와 인권단체들의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지리아 등 다른 나라에서 적도기니의 농장에 파견되었던 해외노동자들을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살벌한 처형이 감행되는 적도기니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변을 당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였죠.

적도기니 국민들도 살벌한 처형을 일삼는 프란시스코와 적도기니 당국의 행위에 대항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국가로 대량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김씨 왕조 독재를 피해 망명하는 탈북민들과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적도기니 인구의 3분의 1을 넘는 10만여 명이 해외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1979년 8월 3일,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대통령의 조카였던 적도기니 국방장관 테오도로 오비앙 음바소고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프란시스코를 호위하던 경호부대가 저항했지만 보름이 지난 8월 18일 그들은 생포되었습니다. 최고군사회의는 체포된 지 한 달이 지난 9월 24일에 프란시스코와 그 측근들을 재판하기 위한 군사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5일 후인 1979년 9월 29일, 대량학살과 살인, 공금횡령, 인권침해, 반역 등 범죄가 인정되어 독재자 프란시스코와 5명의 공범자에게는 사형과 재산 몰수형이, 2명의 독재자 하수인에게는 14년형이, 또 나머지 2명에게는 4년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특별군사재판으로 이루어진 이 판결은 단심으로 끝났고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와 5명의 독재자 하수인들은 판결 당일 저녁 6시 모로코군 소총부대에 의해 블랙비치 감옥(Black Beach Prison)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2년 전부터 프란시스코는 네 자녀를 해외에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자신에게 독재수법을 전수해준 김일성에게 세 자녀를 맡겼고 아들 파코 응게마, 두 딸들인 마리벨 응게마와 모니카 응게마는 북한에 보내졌습니다. 결국 다행히도 네 자녀는 쿠데타로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죠.

저는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자주 만경대유희장에 가곤 했는데 그때 만경대혁명학원 교복을 입고 그곳에 놀러 왔던 프란시스코의 자녀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사투리로 흑인을 ‘깜대’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저 깜대는 아버지가 적도기니 대통령이었는데 조카가 삼촌을 쿠데타로 처형하고 그 자녀들이 조선에 왔다”는 말을 하곤 했죠.

막내딸인 모니카 마시아스 응게마는 7살에 북한에 갔고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평양경공업대학 피복공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북한에서 20여 년을 보낸 시점인 1998년에 모니카는 중국과 스페인, 미국 등을 여행하면서 독재국가인 북한에 다시 돌아가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지금 그녀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삼촌을 쿠데타로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현재까지 42년 동안 대통령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선진국가들은 대통령직을 4~5년을 임기로 하고 있으며 재임하더라도 10년은 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장기집권이 독재의 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이어진 김씨 일가의 장기집권은 현재 76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낡고 부패했던 봉건왕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이젠 끝장을 내야 북한주민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