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독재자들의 인생 종말에는 추방과 무기징역, 사형 등 준엄한 인민의 심판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앞선 시간들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독재자들의 전철을 지켜보노라면 지구상에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3대 세습으로, 현대판 왕족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김씨 일가의 말로가 눈에 선히 안겨옵니다.
오늘은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잔혹한 독재자였던 전 우간다 대통령 이디 아민(Idi Amin)이 추방되어 타국에서 버림을 받으며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데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24년에 우간다 북서부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아루아(Arua)의 농부이자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이디 아민은 어릴 적부터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키가 193cm의 거구로 유년시절에 한때는 권투와 럭비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22살이 되던 1946년에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우간다 식민지군에 입대하여 1961년에 육군 중위 장교로 승진한 이디 아민은 1962년 우간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후 2년 만인 1964년에는 새 독립정부의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습니다.
이디 아민은 1966년 당시 우간다 총리였던 밀턴 오보테를 지지하면서 우간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데 동참한 공로로, 우간다 정부군 육군과 공군의 최고 수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내륙국인 우간다에서 육군과 공군 수장은 정부군의 최고 책임자인 셈이었죠.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정부군 수장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디 아민은 1971년 1월 25일에 자기를 군사령관으로 내세운 대통령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디 아민은 1975년에는 군사령관을 겸하였고 그 다음해인 1976년에는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종신대통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민족주의자들을 마구 처형했던 종파사건에 대해 배워서 잘 아실 거라 봅니다.
독재자들은 한때는 혁명동지였지만 그가 자신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되면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워 처형합니다. 김일성이 유일적 지배체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정치범관리소가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북한 김씨 일가의 독재가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반인민적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독립을 이룩하였으나 정권을 잡은 국가지도자들은 북한 같은 독재국가를 유지하려고 북한에 와서 김일성의 독재수법을 배워갔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북한을 다녀간 아프리카 대통령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당시에 살았던 북한주민들이라면 노동신문에 실렸던 보도내용들이 기억날 것입니다. 저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면서 아프리카 대통령 연도환영에 자주 나가서 눈앞에 선합니다.
우간다 이디 아민도 북한식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려고 하였죠. 그는 197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자신의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이 대상들에는 우간다의 지식인들과 군 장교들, 법관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이디 아민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처럼 자신을 군 사령관으로 내세워주었던 오보테 전 대통령을 쿠데타로 권좌에서 몰아내면서 동시에 그 지지세력들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이디 아민의 피의 숙청으로 3,000여 명의 반대파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살해당했으며 전 대통령을 지지하였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이러한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이디 아민을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 검은 히틀러’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디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8년간 무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이 국제인권단체들의 주장입니다.
독재자들은 외부정보가 유입되어 국민들이 진실을 아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현재 지구상에 인터넷과 라디오 등 외부정보를 막고 있는 북한당국과 북한주민들을 가리켜 전 세계 사람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라고 조소하고 있습니다. 우간다 전 대통령 이디 아민도 외부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자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아시아인들, 인도인들을 추방하였습니다.
1960년대 북한에서 김일성이 당시 북한 유학생들과 결혼하여 북한에 와서 살았던 동유럽국가 여성들을 추방한 것과 꼭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하였던 재일귀국동포들을 고향인 일본에 가지 못하게 했던 것과도 같은 반인륜행위였습니다.
이디 아민은 당시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우간다처럼 독재국가였던 관계로 그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1975년에는 아프리카연합기구인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권력세습을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이디 아민은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쇠망치로 머리를 쳐서 즉사시켰고 지독한 성고문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게 했습니다. 악어가 욱실거리는 강에 악어의 먹이로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말 북한에서 독재자 김정일에 의해 보위사령부 검열로 수천여 명이 처형된 것과 같은 행위였죠. 역사학자들은 당시 이디 아민의 지시로 처형된 사람들의 시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악어가 먹고도 남아돌 정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은 7명의 처와 40여 명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명의 처 중에서 3명의 처는 얼마 살지 않고 곧바로 이혼을 했습니다.
이디 아민과 살다가 이혼한 여성 중에 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이혼 후 임신했던 아들을 산부인과병원에 가서 유산을 했는데 이일로 하여 케이와 수술을 한 의사도 처형되었습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이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하자 우간다 국민들의 반정부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에 군인들이 앞장섰으며 이디 아민의 탄압을 피해 탄자니아에 망명했던 우간다 피난민들이 합세했습니다.
종신대통령을 꿈꾸는 독재자 이디 아민을 심판하기 위해 결성된 반정부군인 국민해방전선은 정부군 사이의 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대오를 정비하려고 탄자니아로 피난했고 이 일로 하여 이디 아민은 탄자니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탄자니아군은 우간다 정부군의 침략에 맞서 반격을 가했고 여기에 우간다의 피난민들과 반정부군이 합세했습니다.
결국 1979년 4월 11일에 탄자니아군과 우간다 국민해방전선의 반격에 우간다 정부군은 패하게 되었고 독재자 이디 아민은 리비아로 도망쳤습니다. 반정부 소탕전에 이디 아민을 지원해 군대를 파견했던 리비아도 이디 아민의 리비아로의 망명을 달가워하지 않자 그는 다시 이라크로 망명했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으로부터도 홀대를 받자, 이디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을 했죠. 이렇듯 무소불위의 독재로 우간다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디 아민은 국민의 심판으로 쫓겨난 뒤 여러 나라들에 떠돌다가 2003년 8월 16일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김정은은 3대 세습에 이어 영원한 김씨 일가의 독재체제를 꿈꾸지만 지금은 21세기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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