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2010년 말에 시작된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는 2011년 1월 민주화 혁명인 ‘재스민 혁명’으로 이어졌고, 재스민 혁명은 리비아와 이집트 등으로 번져 ‘아랍의 봄’이라는 반 정부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은 재스민 혁명으로 23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오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던 튀니지의 전 대통령 벤 알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제인 엘 아비디네 벤 알리, Zine El Abidine Ben Ali)는 1936년 9월 3일 튀니지의 동북부 해안도시인 함맘 수스(Hammam Souss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날 당시 튀니지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벤 알리는 튀니지의 반식민지 투쟁의 선구자였던 하비브 부르기바(Habib Bourguiba)의 지도를 받으면서 프랑스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참가했습니다. 프랑스는 당시 식민지였던 튀니지 지배를 포기하면서 1956년 튀니지는 독립하였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는 벤 알리의 정치적 스승인 하비브 부르기바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벤 알리는 독립운동 당시 부르기바 대통령의 지도를 받았던 경력으로 독립 후 프랑스의 상 씰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고 튀니지군 고위급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20살 나이에 독립 후 18년 동안 유학을 마치고 튀니지 군에서 군 장교로 그리고 30대 중반에는 군 안보국장을 역임했던 벤 알리는 38살이 되던 1974년에 모로코 주재 튀니지대사관 군사무관으로 임명되어 해외생활을 하였고 3년 뒤인 1977년에 귀국하여 튀니지군 국방장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 4월에는 폴란드 주재 튀니지대사로 임명되었고 1984년 1월에 귀국하여 튀니지 국가안전국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 튀니지 국가안전보장 담당 국가위원장이 된 벤 알리는 1986년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87년에는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7일 벤 알리는 무혈 쿠데타로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을 퇴임시키고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당시 벤 알리는 “대통령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총리가 대신한다”는 헌법을 근거로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했다고 변명했지만 국제사회와 튀니지 국민들은 무혈 쿠데타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쿠데타로 대통령직에 오른 벤 알리는 첫 연설에서 튀니지 국민들에게 “조국의 독립과 그 진보의 유지가 국민의 책무”이며 “책임있는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국민주권을 존중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연설내용을 후에 ‘11월 7일 선언’이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벤 알리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초기에는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헌법을 개정하여 시민들에게 자유를 부여해 줄 것"이라느니, "반종교 과격분자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법들을 석방하겠다"느니 하는 감언이설을 늘어놓기도 했죠.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1년 뒤인 1988년에 정부여당인 '사회주의헌정당'을 '입헌민주연합'으로 개칭하고 사회의 민주화와 다원주의 존중, 법치국가 건설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과는 달리 독재자 벤 알리는 진정한 정치적 반대파의 출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조선사회민주당과 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 당들이 독립정당이 아니라 조선노동당의 위성정당인 것과 같은 구조로 튀니지에도 정당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는 정책과 이념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방식의 민주주의 선거이다 보니 보통 지지율이 80%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북한 같은 독재국가들에서는 형식적인 다당제 선거를 한다지만 노동당 일당독재이다 보니 국민의 의사와는 달리 독재정권이 내세운 자가 단독 후보로, 혹은 대통령으로 출마하게 되고 90%를 넘는 투표지지율을 보입니다. 제가 탈북했던 2009년에 치러진 북한의 12기 대의원선거에서 투표율이 99.98%, 찬성률이 100%를 기록했던 것도 독재국가들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죠.
벤 알리는 정권을 잡은 뒤 정치적 반대파들과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박해하고 고문하였으며 처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튀니지에서 1994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득표율이 99.9 %, 1999년에 99.4 %였던 것은 독재국가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독재자들은 자기의 권력유지를 위해 측근들에게만 부와 권세를 집중하여 충성을 하도록 합니다. 그것으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죠.
북한에서 김정일과 김정은이 중앙당 39호실을 비롯한 노동당 외화벌이기관을 두고 자기의 주머니만 달러로 가득 채운 것처럼 벤 알리의 황금에 대한 욕구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부인인 레일라 트라벨시(Leila Trabelsi)와 일가족들을 내세워 호텔, 부동산, 전화망, 항공사들을 장악하였고 튀니지에서 사업하고 싶어하는 투자자들에게 넘겨 지분의 10~20%를 횡령하였습니다. 부인 트라벨시가 프랑스 파리에서 3만 3천 달러를 주고 코트를 사 입었던 것만 봐도 벤알리 일가의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튀니지의 물가는 급등했고 공장들이 폐쇄되면서 청년들마저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되었습니다. 당시 튀니지의 청년실업률은 56%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죠. 북한에서 청년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돌격대에 끌려 나가 현대판 노예생활을 하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2010년 12월 17일 26세의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분신자살로 항거하면서 튀니지 재스민 혁명의 불이 달렸습니다. 여기서 재스민은 튀니지를 대표하는 국화의 이름입니다. 재스민 혁명은 당시 손전화로 찍은 부아지지 청년이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영상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시위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시위가 튀니지뿐 아니라 주변의 독재국가들이었던 리비아와 이집트에도 번져 중동나라들에서는 ‘아랍의 봄’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혁명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급해 맞은 독재자 벤 알리는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분신자살을 시도했던 부아지지 청년을 위문하였지만 2011년 1월 4일 그는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점차 시위는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었고 시위대와 정부군의 충돌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부아지지 청년 사망 3일 뒤인 2011년 1월 7일에는 튀니지의 중부 도시 타라로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폭력으로 막는 경찰서와 정부청사, 은행에 불을 질렀고 1월 8일부터 전국의 도시들에서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지방도시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부아지지 청년 사망 일주일 뒤인 1월 11일에는 마침내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 확대되었습니다. 경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였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1월 14일에는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국가가 마비상태에 빠지자 독재자 벤 알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해산을 발표하였습니다. 결국 부패와 인권침해, 경제파탄을 항의하는 시위로 23년의 장기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벤 알리 독재정권은 허물어지고 벤 알리는 그날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습니다.
2011년 1월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은 2월에 이집트의 ‘코사리 혁명’으로 이어졌고 10월 에는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하였으며 11월에는 예멘의 알리 알둘라 살레가 대통령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도 저승에 가고 말았습니다. 독재자의 운명은 이렇듯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음을 김정은은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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