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대통령이나 주석이 자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21세기에 지구촌을 통틀어 3대에 걸쳐 봉건왕조 같은 후계세습을 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뿐이죠. 그래서 북한을 김씨왕조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왕조국가들에서는 왕의 자리를 놓고 자녀들 사이에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왕의 자녀들 사이에 권력승계를 놓고 죽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두고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이씨왕조의 시조인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 벌어졌던 왕자의 난과 현대 김씨왕조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경남도 영흥군, 지금의 금야군에서 태어난 이성계는 고려왕조 시기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인 동북면의 병마사로 명성을 떨치면서 자기의 지지기반을 넓혀나갔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하류, 의주 인근 섬인 위화도에서 군사들을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당시 고려왕인 우왕을 폐위시킨 이성계는 창왕과 공양왕을 차례로 허수아비 왕으로 등극시켰고, 1392년에는 고려의 제34대 왕인 마지막 왕 공양왕을 정식으로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왕조를 세우고 조선왕조의 시조가 됩니다.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조선왕조를 세웠던 당시의 이성계의 나이는 57세였고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사망하고 두 번째 부인은 신덕왕후 강씨였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던 시기였기에 태조 이성계는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 외에도 성빈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후궁 등 여러 여자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부인이 여럿이다보니 한씨와의 사이에는 6남 2녀를, 강씨와의 사이에는 2남 1녀를, 화의옹주 김씨와 후궁 사이에는 숙신옹주와 의령옹주 각각 딸 하나를 두어 모두 13명의 자녀인 8남 5녀를 두었습니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여섯 아들 중에 맏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는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진 다음해인 1393년에 사망하였으며, 둘째아들인 영안대군 이방과가 조선 제2대 왕으로 올랐던 정종이었습니다.
한씨가 낳은 여섯 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 영안대군 이방과, 익안대군 이방의, 회안대군 이방간, 정안대군 이방원, 덕안대군 이방연 중에서 정몽주를 제거하고 조선왕조 건국에 가장 큰 업적을 쌓았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권력욕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후임으로, 제3대 왕으로 내정하려고 하자 이방원은 군사들을 동원해 자기를 배척하려는 반대파 세력들은 물론 배다른 동생들인 이방번과 이방석을 살해하였죠.
청취자 여러분, 조선왕조 건국 왕인 이성계가 왕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으나 아들들이 서로 왕위 쟁탈전으로 죽고 죽이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 1980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했을 당시가 생각납니다. 북한에서 김씨왕조 제1차 왕자의 난은 김정일과 김평일 사이에 있었죠. 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를 하면서 전당적으로 ‘곁가지 현상’을 철저히 배격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이 활발히 벌어졌습니다.
김일성은 본처 김정숙과 살면서 김정일, 김슈라, 김경희를, 후처인 김성애 사이에는 2남 2녀인 김평일과 김영일, 김경숙, 김경진을 보았고 성씨가 제갈인 안마사와 관계를 맺어 59살 나이인 1971년에는 사생아인 김현을 보았습니다.
김정일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김평일이 후계세습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기에 김평일 형제들을 곁가지라고 부르며 배제하였죠. 김정일은 김평일을 죽이고 싶었으나 김일성을 노하게 하면 후계자로 선택된 자신에게도 별로 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외교관으로 해외생활을 하도록 하고는 김평일 측근들은 모두 처형하거나 숙청했습니다.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김평일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녔는데 당시 대학생들은 김정일보다 키도 크고 생김새도 김일성을 더 닮은 김평일을 앞으로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래면 노래, 기악이면 기악, 그리고 축구를 비롯해 체육도 잘하여 김정일보다 인기가 있었던 김평일이었기에 김정일보다 친구가 더 많았죠.
김정일은 곁가지를 친다는 명분으로 김평일은 해외로 내보내고 그와 사진을 한번이라도 찍은 대상들마저 모두 숙청했습니다. 왕자 쟁탈전의 싹을 완전히 베어버린 것이죠. 이씨왕조시기 제1차 왕자의 난과 김씨왕조의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렇게 너무도 흡사한 모양새였던 것입니다.
1392년 조선개국이래 8년만인 1398년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 일곱 번째 아들인 이방번과 여덟 번째 아들인 이방석이 살해되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난 1400년에 제2의 왕자의 난이 터졌습니다.
동생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배다른 동생들을 죽이고 제3대 조선왕으로 등극하자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이방간이 동생 이방원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왕궁을 치려고 했습니다.
이방간은 둘째 형인 조선2대왕인 정종에게 조선 3대왕이 된 동생 이방원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 할 수 없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했고 이성계에게도 이 같은 내용을 아뢰고 태종을 제거하려 했으나 아버지인 이성계와 정종이 오히려 반대해 나서고 이방원도 형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데 대해 용서해줄 뜻을 밝히자, 3대왕인 이방원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방원은 형 이방간을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조실록에는 당시 이성계가 왕자의 난을 일으키려는 이방간에게 했던 말은 “네가 방원이랑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소같은 여석, 정말 미쳤구나(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씨왕조의 제2차 왕자의 난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김정일에 의한 김씨왕조의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김정은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이 떠오릅니다.
김정일은 다섯 명의 여인들로부터 3남 5녀, 슬하에 모두 8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대학동창이었던 홍일천 사이에는 딸 김혜경을, 배우인 성혜림 사이에는 맏아들 김정남을, 김일성이 정식 인정한 본처인 김영숙 사이에는 두딸인 김설송과 김춘송을, 무용배우인 재포출신 배우인 고영희 사이에는 김정철과 김정은, 김여정이 태어났죠. 김정은은 배다른 형인 김정남이 권력 승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후계자로 공식화되고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암살지시를 내렸습니다.
김정은의 지시로 암살지시를 받은 정찰총국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일의 맏아들이며 김정은의 배다른 형인 김정남을 독살했습니다. 리지현, 홍송학, 오종길, 리재남 등 북한 정찰총국 요원들은 도주하였지만 현지에서 체포된 북한 정찰총국 요원인 리정철과 북한정찰총국에 매수된 외국여성들인 도안티 흐엉과 무하메드 잘라루딘의 진술로 김정은의 독살지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죠.
김정은이 김정남을 권력유지의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무참하게 살해한 2차 왕자의 난은 근 700년 전 이씨왕조의 2차 왕자의 난과 같다는 의미에서 북한은 여전히 현대사회가 아닌 수백년 전의 봉건왕조국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남은 김정철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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