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과 주석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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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이씨조선의 경복궁과 김씨왕조의 주석궁전에 대해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봉건국가들의 왕궁으로는 고구려 시기에는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안학궁, 고려시기에는 개성시의 만월대 고려왕궁, 이씨조선왕조 때에는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경복궁이 있습니다.

이 왕궁들은 북쪽으로는 산을 끼고 남향으로 지었기에 고구려시기의 안학궁은 평양시 대성산의 남쪽기슭에, 고려시기의 만월대 고려왕궁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이씨조선시대 경복궁은 서울의 북악산 남쪽기슭에 지어졌습니다. 이를 남향으로 지어졌다고 하죠.

마찬가지로 현대판 봉건왕조국가인 김씨왕조 북한의 주석궁도 평양시 대성산구역에 위치한 대성산과 모란봉구역의 모란봉 사이에 건설되었습니다.

오늘은 고려시기 이후, 김씨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 존재했던 이씨왕조의 왕궁이었던 경복궁과 북한의 주석궁이 언제 어떻게 건축되었고 건축 이후에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어떤 용도로 이용되는지에 대해 서로 비교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이씨왕조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새로운 봉건왕조인 조선을 건국하였지만 처음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가 개국 3개월만인 10월에 새 조선왕조의 수도를 옮기기 위해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계룡산 일대와 서울 신촌의 무악지역 그리고 이씨왕조의 왕궁인 경복궁 일대를 직접 돌아보게 됩니다.

한양이라고 불리던 서울 행차까지 마친 태조 이성계는 당대 유명한 스님이자 임금의 스승이었던 왕사(王師) 무학대사에게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이성계의 물음에 무학대사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은 편편하고 넓어 왕궁이 들어서기에 적절하다”고 아뢰었고 결국1394년 8월에 서울이 새 봉건왕조, 이씨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게 됩니다.

서울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왕궁 건설을 관장할 기구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내온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었던 1394년 10월 25일에 현재 서울의 종로구 낙원동 일대에 있던 객사에 거처하면서 자기가 주거할 경복궁 궁궐과 종묘 공사를 지휘하였습니다. 여기서 종묘는 왕족이 선친들의 위폐를 보관하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합니다.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어 10개월이 지난 1395년 9월에 390여 칸의 왕궁이 완공되어 태조 이성계가 입궐하였습니다. 당시 왕궁으로 지어진 건물로는 왕의 의전행사를 하던 근정전과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연생전(延生殿), 경선전(慶成殿),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交泰殿), 왕이 산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한 사정전(思政殿) 등이었습니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왕조 시조인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자 조선 제4대 왕인 세종대왕에 의해 경복궁에는 왕세자들이 거처하는 자선당,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위패를 보관한 문소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북문인 신무문 등을 새로 지어 왕궁의 품위는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은 세종대왕 시기에 와서야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53년에 일어난 화재로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들과 침전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 선조왕이 1592년 4월 30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두려워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평안북도 의주로 피하자 백성을 버린 왕의 비겁함에 분노한 서울 백성들은 왕궁을 불태웠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창덕궁이 재건되어 270여년 동안은 창덕궁이 왕궁 역할을 해오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1867년에 경복궁은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습니다. 그 후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일본군에 의해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명성황후 민비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경복궁은 이씨 조선왕조의 시작과 끝을 같이한 왕궁으로, 지금은 대한민국의 유명한 관광지로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경복궁이 이씨 조선왕조의 왕궁이라면 북한의 주석궁전은 김씨 조선왕조의 왕궁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평양시 대성구역에 위치한 주석궁전의 정식명칭은 금수산의사당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 폭침으로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으나 소련군이 38선 이북지역을 점령하면서 한반도는 둘로 갈라지게 되었죠.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군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피해 소련으로 들어간 김일성은 살아남기 위해 소련군 극동사령부 88저격여단 군인으로 입대하여 근 5년 동안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비밀이 아닙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당시 찍은 사진 중에는 소련군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들이 있고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소련군 복무생활에 대해 인터넷들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북한이 인터넷을 폐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내용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죠.

김일성이 해방이 되어 한 달이 지난 1945년 9월 19일에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해 처음 맡은 직책은 평양지구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공산당과 북한주둔 소련군에 의해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위원회가 발족되면서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3월에 조선공산당 당수로 취임되면서 권력기반이 확대되었습니다.

스탈린의 지령과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일성은 당시 공산당 청사로 사용하였던 건물에서 거처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지금의 당창건사적관이 바로 당시의 공산당청사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김정일이 동생인 김만일, 당시에 김정일은 소련식의 이름인 김유라였고 동생 김만일은 김슈라였는데 당창건기념관 저택 인근의 연못에서 놀다가 동생이 익사해 죽게 되고 이로 인해 김일성은 저택을 지금의 보통문 인근,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옆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의 생일 60돌을 맞는 1972년에 주석궁전을 새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에 의해 금수산의사당, 주석궁이 건설되게 되었습니다.

이씨 조선왕조의 시조인 이성계가 60살이 되던 1395년에 왕궁이 경복궁에 입궁한 것처럼 북한의 주석궁 건설 지시도 김일성의 환갑을 맞는 해인 1972년에 방침으로 하달된 셈이었습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니 주석궁 건설에 동원되어 화선입당을 한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성분이 좋은 대상들로 당원돌격대를 무어 주석궁 건설을 했던 것입니다. 천연대리석, 보석, 금, 은 등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간 주석궁에서 김일성은 현대판 봉건왕조 김씨조선의 시조답게 진수성찬에 예술단 배우들을 끌어들여 이씨왕조들도 뺨칠 정도의 호화생활을 누렸습니다.

김일성은 주석궁에서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지만 김정일은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꺼렸죠. 핵과 미사일개발로 전 세계의 적으로 지탄받는 김정일과 김정은은 한 곳에서 거주하다가 사살되는 것이 두려워 북한의 전국 각지에 초대소와 별장들을 지어놓고 자기의 침소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주석궁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 박제품 전시장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