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수령만을 위한 8호안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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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북한의 어디를 가나 '외화벌이사업소', '5호관리소' 말고도 '8호사업소'와 '9호사업소'가 있음을 현지 주민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외화벌이사업소'와 '5호관리소'는 김일성 일가의 자금과 노동당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공개적으로 만든 기관이지만 '8호사업소'와 '9호사업소'는 아직까지 외부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조직들입니다.

하지만 이곳 '8호'와 '9호사업소'들에서 김일성 일가의 건강과 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식료품들과 의류, 생활필수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의 일반 주민들만 모를 뿐 웬만한 간부들은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이러한 8호와 9호사업소들의 운영을 관리하는 사법기관도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8호 안전부'가 바로 그러한 기관인데요. 그래서 오늘은 각 지방의 8호, 9호사업소들과 그와 연관된 기관, 부서들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조직된 '8호 안전부'에 대하여 이야기 해드리려 합니다.

'8호 안전부'는 김일성 일가의 먹을 거리 생산을 보장하는 기관의 무장경비를 서고 8호, 9호사업소들과 관련 기관들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수사하고 예심을 진행하는 사법기관입니다. 본부는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김일성 일가와 관련해 8과, 9라는 숫자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8호농장, 8호작업반, 8호제품과 함께 9호열차, 9호사업소라는 말은 평양과 지방, 도시와 농촌, 바닷가와 산골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고산지대의 약초들과 송이버섯, 과일류들, 수산물과 야채들이 8호, 9호 제품으로 불리며 김일성 일가에게 정상적으로 진상되었고 이런 특제품의 가짓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함경북도의 명천군과 연사군을 비롯한 지방의 8호사업소들에서 송이버섯을, 온성군과 명천군의 9호사업소들에서는 수박과 참외를 심었습니다. 홍원수산과 어대진수산, 리원수산 등 바다가에 있는 9호사업소에서는 고급어패류들을 잡았습니다.

황해남도 송화군과 성천군, 과일군에는 사과와 박배, 약밤을 농사짓는 8호농장들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인민들이 쳐다보아서도 안 되는 특제품으로 여겨졌고 오직 김일성 일가의 밥상에만 올랐습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비밀 사업은 모두 숫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찍은 사진은 1호사진, 총련학교들의 교과서를 제작하는 '조국사'건물은 3호청사, 군수생산은 제2경제위원회, 만수무강연구소의 각 부서들도 1실, 2실과 같이 숫자로만 불렀습니다.

김일성은 숫자 9를 좋아하였는지 자기의 신변을 보위하는 호위사령부 부대의 명칭을 '963군부대'라고 지었습니다. 앞자리에 9라는 숫자를 놓고 뒷자리에 붙은 숫자 6과 3을 합하면 합이 9가 되도록 이름 지었습니다.

김일성이 통치하던 1980년대 이전에는 숫자 9를 많이 썼는데 1980년대 중반 김정일이 권력에 개입하면서 숫자 8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승용차와 화물차는 '평양98', 산하 8호, 9호제품 수송차량은 '평양99'를 사용했습니다.

김일성의 통치자금을 마련하는 중앙당 기관 명칭도 39호실, 그리고 김정일의 통치자금을 마련하는 기관 명칭은 38호실이라고 지었고 금수산의사당경리부산하의 무역회사의 이름도 '릉라888'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본부청사나 만수무강연구소 건물들은 호위사령부가 24시간 무장보초를 섰지만 룡성특수식료공장과 운곡목장, 태평술공장 등 산하 기업소의 경비근무는 '8호안전부'와 그들이 전문 관리하는 인민 보위대가 맡았습니다.

'8호 안전부'는 김일성 일가에게 보장되는 제품들을 관리문제로부터 사용상 부주의나 사고와 같은 문제, 특제품 생산과정의 비밀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가를 감시하고 9호 열차와 각종 수송수단의 움직임도 추적하고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8호 안전부'는 김일성과 김정일만의 특수사법기관으로 현재 인민보안부인 당시의 사회안전부는 일체 관할하지 못했습니다. 원자재 창고의 관리와 생산된 특제품의 경비까지 '8호 안전부'의 업무에 속해 그 권한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8호 안전부'는 구류장과 수사실, 예심실을 갖춘 도보안국 규모의 수사감시 기관으로 평양시의 중심부에 둥지를 틀고 위세를 떨쳤습니다. 저도 뜻하지 않게 '8호 안전부'에 구금돼 운명의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90년 '1월 8일 방침'으로 양강도 일대의 국영종합농장들이 아편재배를 위한 농장으로 전환되고 농장 이름도 백도라지농장으로 개명됐습니다. 확장되는 아편면적과 농장의 규모에 따라 여러 지역에 새로운 도로들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도로건설은 지방의 8호, 9호사업소들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잠자던 고산지대의 원시림이 도로건설을 위한 폭파소리에 뒤흔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 채 뽑혀나갔습니다.

건설자들은 휴식 일이면 몰래 폭파 조에서 빼낸 뇌관과 폭약심지를 지고 나와 서두수 저수지와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여유를 즐겼습니다. 술병에 넣은 질소비료를 뇌관과 폭약심지에 연결해 수중에서 터트리면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습니다.

당시 백도라지 농장에 동원을 나왔던 저는 교대인원이 도착해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남게 된 친구가 책이 든 소포를 자기 집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의 집과 친구의 집이 그리 멀지 않아 저는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연구원에 출근한 사이 중학생이었던 저의 동생이 소포에 무슨 책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몰래 열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책자와 함께 뜨로찔(폭약 가루의 일종) 세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연구원에서 퇴근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당위원회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 친구는 연구원에서 해고되는 것은 물론 '혁명의 수도'인 평양에 폭약을 반입한 죄로 출당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 갈 것이었습니다.

저는 친구가 맡긴 소포를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그가 돌아왔을 때 조용히 불러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친구와 그의 가족들의 장래를 생각해 당 조직에는 사건을 숨기고 절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말하기를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의 환갑이 곧 있는데 물고기를 잡아 상에 올리기 위해 몰래 뜨로찔을 빼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위 부 정보망이 그물처럼 깔린 북한에서 친구들 사이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돌아온 지 며칠 뒤 영문도 모른 채 저는 '8호 안전부'에 끌려갔고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인생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족쇄로 결박된 채 '8호 안전부' 구류장에 처박히는 순간 천국 같던 저의 생활은 지옥 으로 바뀌었습니다.

구류장에는 몇 달째 수사를 받으며 수염이 덥수룩이 자란 대여섯 명의 죄인들이 있었는데 다짜고짜로 구류장에 팽개쳐진 나에게 집단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땅에 박고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조사실에 끌려갔다 나오면 그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어 숨기고 있는 내용을 솔직히 고백하라고 무릿매를 안겼습니다. 어이없게도 나는 폭약사건의 공범자가 되어 3일간의 조사와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거듭되는 고문과 조사로 제가 공범이 아니라는 것이 철저히 해명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폭약사건을 당 조직에 숨겼다는 이유로 저는 만수무강연구소 산하 만청산연구원에서 끝내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당 조직을 속였다는 건 김 부자의 만수무강을 연구하는 호위과학자로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제가 '8호 안전부'를 거쳐 금수산의사당과 중앙당청사를 오가며 비판서를 쓰고 있을 때 사건의 당사자인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산간오지로 추방당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에서 해고 되는 날 연구실 당세포비서는 이번 사건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고도 남을 일인데 관대히 용서받은 것이라며 앞으로 어디에 가든지 당조직에 속을 주는 충성당원으로 살라고 저에게 당부했습니다.

수령의 전사로 살려면 모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끔찍한 진리를 저는 그 때에야 실감했습니다. 오직 수령만을 위한 나라, 그 지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8호 안전부'는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8호 안전부'에서 무사히 풀려났으니 저도 어찌 보면 행운아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들에는 저처럼 호위과학연구에 종사하다가 본의 아니게 죄가 아닌 죄를 짓고 온 가족과 함께 갇힌 지식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 수령만을 위한 독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 파쇼 권력을 위해 만들어진 '8호 안전부'도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보장할 수 없었던 8호, 9호사업소들과 함께 반드시 우리 조국의 역사에서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