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시대의 채홍사와 중앙당 5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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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 사는 주민치고 중앙당 5과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중앙당 5과는 각 도마다 내려가 인물이 곱고 토대가 좋은 10대의 어린 처녀들을 뽑아 김일성과 김정일, 지금은 김정은 가까이에서 일하도록 제공하는 중앙당의 특수기관이죠.

10대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주석궁전이나 북한의 김씨왕조를 위한 초대소들에서 김씨왕조의 몸시중을 들거나 예술단들에서 성악과 기악을 배워 춤과 노래로 만족을 선사해야 하는 것이 5과 대상으로 뽑힌 여성들이 해야 할 직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5과 대상으로 뽑힌 여성들 중에서 일부는 평양의학대학에서 간호사 교육과 안마하는 방법 등을 배워 김씨왕조 뿐아니라 고위특권층 간부의 몸종이 되어 그들의 이성적인 욕구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몸 가까이에서 ‘담당 간호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종일토록 온몸을 주물러주는 안마사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씨왕조시기에도 북한의 5과 대상을 뽑는 중앙당 5과 같은 기구가 있었습니다. 이씨조선시대 제10대 왕이었던 연산군 시대에 생겨난 채홍사가 바로 그런 기구였습니다. 그럼 오늘날의 중앙당 5과와 같은 채홍사라는 기구를 만들어 낸 연산군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이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죽자 후궁으로 숙의 윤씨를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김일성이 본처인 김정숙이 죽자 후처로 김성애를 맞아들였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성종왕은 후궁인 윤 씨를 두고도 다른 후궁들을 맞아들여 돌아가면서 왕비 윤 씨는 후궁들을 죽이려고 사약을 구해두었다가 발각됩니다. 성종과 왕비 윤 씨와의 갈등이 심해졌고 윤 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고 맙니다. 이를 계기로 윤 씨는 성종의 아들 연산군까지 낳았지만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죠.

왕궁에서 쫓겨난 윤 씨는 결국 왕이 내린 사약을 먹고 죽게 되고 어린 나이에 다른 후궁인 정현왕후의 손에서 자란 연산군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성장하여 훗날 왕에 즉위하게 됩니다.

7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12년 동안 세자수업을 받은 연산군은 19살에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의 친모가 독약을 내리받아 먹고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시 자기의 친모를 죽게 만든 후궁들인 엄 씨와 정 씨를 끌어내다가 천을 뒤집어씌우고 마구 몽둥이질를 했습니다. 그리고 후궁 정씨의 자식이자 자기의 이복동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도 몽둥이를 쥐어주면서 천으로 덮어져 누군지 알 수 없는 자기의 모친을 때리도록 했죠.

결국 두 후궁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고 이복동생들은 유배를 갔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김정일이 친모인 김정숙이 죽고 훗엄마로 들어온 김성애와 이복동생들인 김평일 형제들을 곁가지라고 하면서 숙청해버린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자기의 친모를 죽게 했다며 화풀이를 했고 연산군에게 머리를 받힌 인수대비는 그 일로 몸져 누었다가 죽게 됩니다. 또 자기의 친모가 죽임을 당할 당시 대신들이 이를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마구 처형했습니다.

이씨왕조시기에 일어난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자기의 친모 윤 씨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복수하고 왕비로 명성을 높이려고 하자 반대했던 신하들을 무참히 처형한 사건입니다.

연산군의 친모 윤 씨 폐출과 왕비 복위를 반대했던 신하들인 권달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金宏弼), 이주 등은 극형에 처해졌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 당했습니다. 부관참시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묘지에서 꺼내어 뼈를 탕쳐서 부셔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말합니다.

연산군은 이들을 처형하거나 부관참시를 한 것도 부족해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부모가 잘못하였다고 하여 자식들도 함께 정치범관리소에 가야만 하는 것과도 너무도 닮은 모습이죠.

살인적인 기질로 처형과 숙청을 벌이던 연산군에게 있어서 불만을 해소하고 웃음을 선사하는 일은 여성들과의 무질서한 이성행각이었죠. 청취자 여러분들도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흥청망청은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연산군 시대였습니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 6월에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들과 튼튼한 말을 구하는 업무를 맡아보는 '채홍준사(採紅駿使)'를 파견하였습니다. 채홍준사를 채홍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연산군 일기에는 “이계동을 전라도에, 임숭재를 경상도, 충청도에 보내 채홍준사라 칭하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계집을 간택해 오게 하라”고 연산군이 지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인물이 뛰어난 천여 명의 여성들이 원각사에 들어오게 되죠. 이들 중에서 재주만 뛰어난 기생은 '운평'이라 하였고, 재주뿐만 아니라 미모가 아름다운 기생은 '흥청'이라 불렀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예쁜 기생들을 ‘흥청(興淸)’ 이라고 부른 것은 맑은 기운으로 흥겹게 해준다는 데서 나온 한자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연산군이 흥청이들과 놀아나다 망했다’는 뜻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왕궁인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늘 흥청들과 노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북한 노동당 중앙당 청사 내에 있는 목란관과 각 지역에 있는 초대소가 현대판 김씨왕조의 흥청이들인 5과 대상들이 김씨왕조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곳입니다.

연산군이 이렇게 흥청이들과 기생놀이에 빠져 살았고 채홍사를 통해 흥청이들을 계속 발굴하여 왕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기생놀이에만 미친 연산군의 타락한 생활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궁핍한 생활은 더 이상 헤어져 나오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되죠.

채홍사가 모집한 기생들 속에는 장녹수라고 불리는 흥청이도 있었습니다. 궁궐에 들어온 장녹수는 금세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연산군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김정일의 기쁨조에 뽑혀 춤을 잘 추었던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도 중앙당 5과를 통과해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성장했던 현대판 흥청이었습니다. 김정일의 눈에 들어서 김정은 형제를 낳았지만 기생이나 첩과 같은 신분이었던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죽을 때까지 시아버지인 김일성에게 며느리로 나설 수 없었죠.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한껏 받은 장녹수는 이를 믿고 권세를 마음껏 휘둘렀고 장녹수의 하인들까지도 그의 기세를 믿고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반정군들은 장녹수를 체포해 칼로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습니다.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에서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었고 두 달도 안 되어 울화통으로 죽고 맙니다.

채홍사를 두고 전국각지에서 미모의 여성들을 모집하여 온갖 추한 행각을 일삼던 독재자 연산군의 이성 행각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북한에서 김씨왕조에 의해 재현되고 있습니다.

중앙당 5과에 뽑혔다고 기뻐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의 북한주민들은 딸들이 김씨왕조와 고위 특권층의 성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에 최근에는 5과 대상에 걸리면 탄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중앙당 5과에 끌려가 성노예로 전락되어 일생을 망쳐 살아야 하는 북한 여성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현대판 봉건왕족이 붕괴되는 길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