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조선시대 왕들이 정실부인인 왕비 외에도 첩에 해당한 후궁들을 두었다는 사실은 역사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리조봉건시대 2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역대 왕들 중에 18대 왕인 현종과 20대 왕인 경종을 제외하고 25명의 왕들이 모두 정실부인인 왕비 외에도 1명으로부터 19명까지 차이가 나지만 첩인 후궁을 두었습니다.
오늘날, 김일성은 김정숙이 죽고 나서 후처인 김성애를 공식적으로 맞아들였지만 김정일은 정실부인인 김영숙 외에도 여러 명의 여성들과 동시에 동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시대의 후궁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당대 왕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던 김정일의 여성편력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리조봉건시대에 후궁 제도는 당시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왕들이 공개적으로 왕비 외에도 후궁을 두어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의 첩에 해당한 후궁은 정1품부터 종4품까지 품계를 받는 공적인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은 본처와 첩의 관계로 그 지위는 불평등한 관계였고 그로 인해 항상 궁성 안에서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곤 했죠. 후궁들은 왕과 육체적 관계를 통해 사랑을 나누거나 자식을 둘 수는 있으나 왕의 부인으로 행세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법전에 있는 처첩제는 일부다처제가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정실부인으로 본처 단 1명만 두어야 했고 나머지 여성들은 첩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처와 첩의 불평등한 구분은 당사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자식까지 이어져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만들어 놓았죠.
왕만 아니라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도 저마다 처와 첩을 두고 자기의 세력을 뽐내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광복 후 1946년 7월 30일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45호로 남녀평등법(男女平等權에 對한 法令)이 발포되었고 이 법의 7조에 중세기적 봉건관계의 유습과 여자를 처나 첩으로 매매하는 행위 금지, 기생 권번, 기생 학교 금지 등 일부일처제 준수에 관해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수령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내세워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 학부 졸업생인 홍일천과 동거하였고 홍일천은 1966년 김정일의 맏딸 김혜경을 낳았습니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25살이었죠. 결국 처녀시절에 혼인도 하지 않고 김정일과 동거하면서 딸을 낳은 홍일천은 정실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 성혜림, 김영숙, 고영희, 김옥 등 여러 여성들과 동거한 김정일의 여성편력 행보는 북한의 법에도 위촉되는 행위였으나 수령의 아들이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법 조항을 들이대며 처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다시 리조봉건시대 왕의 첩이었던 후궁들의 삶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조선시대 국가전례기록을 보면 후궁들을 위한 혼례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결혼식은 남녀 간의 정식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공식적인 의식입니다. 혈연적으로 무관한 남녀가 서로 결합해 사회적으로 부부라는 지위를 인정받는 혼례는 결혼식을 통해 주변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리조봉건시대 후궁들은 첩의 위치에 있다 보니 결혼식이라는 혼례는 치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후궁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궁에 들어와 부부의 권리는 고사하고 정실부인인 왕비의 눈총과 천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신부가 신랑 집에 와서 올리는 혼례를 치를 수 없었던 후궁은 신랑 없이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알현하는 간단한 의식만 거행했습니다.
25살 나이에 홍일천을 만나 1966년 딸을 보았지만 1967년에 터진 갑산파 숙청으로 독기가 올랐던 김일성에게 이런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김정일은 혼례를 생각할 수 없었고 그 후 자신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은 영화배우 성혜림과 동거하면서 1971년 맏아들 김정남을 보게 되죠.
당시 북한 조선예술영화 ‘백일홍’과 ‘온정령’에 출연헸던 성혜림은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아는 북한의 유명 작가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해 딸 리옥돌을 낳은 유부녀였지만 홍일천보다 인물이 고운 그에게 반한 김정일은 이성욕구 충족을 위해 그와 동거하였던 것입니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도 재포출신 무용배우로 김일성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의 여성이었습니다. 홍일천과 성혜림과 동거하면서 맏딸과 맏아들을 보았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결국 김일성의 비서실 타자수였던 김영숙을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여 혼례를 치르게 되죠.
그러나 김설송과 김춘송 두 딸을 낳았던 정실부인 김영숙은 인물이 곱고 애교를 잘 부리는 고영희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김정일은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인 재포출신 고영희를 원산 초대소 등 여러 초대소에 숨겨놓고 김일성 몰래 동거를 하였고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형제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영희도 리조봉건시대의 후궁과 같은 지위에 있다보니 혼례를 치를 수 없었습니다. 만약 김정일과 고영희가 혼례를 치렀다면 지금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후계 세습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결혼식 사진을 공개했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고영희가 유선암에 걸려 외국에 가서 치료하는 동안에는 자기의 서기실 출신의 23살 어린 김옥과 동거를 하였습니다. 김정일의 마지막 최후를 함께했던 김옥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2000년 10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에게 가장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던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 같은 존재는 리조봉건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씨왕조2대 왕인 헌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김 씨가 김정은이 생모 고영희와 비슷한 왕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이었습니다.
창덕궁은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왕궁인 경복궁과 함께 조선의 왕궁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창덕궁의 낙선재에는 ‘복을 내리는 곳’이란 의미로 지어진 석복헌(錫福軒)이란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 건물의 주인이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 씨였습니다.
경빈 김씨는 내관부의 후궁 선발로 궁에 입궐하여 우연히 헌종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맞아들여집니다. 후궁으로 간택된 경빈 김씨를 위해 헌종은 석복헌을 지어 거처하도록 하고 왕비보다 경빈 김 씨와의 동거를 더 자주 가졌습니다.
김정일이 본처인 김영숙을 제치고 원산 초대소에 숨겨놓은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와 더 자주 동거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죠. 김일성은 이렇게 몰래 첩인 고영희와 만나는 김정일의 여성편력에 대해 알지 못했고 사생아에 불과한 김정은 형제의 존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은은 김일성의 외모와 행동거지를 본 따려 하지만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공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이 있듯이 김정일이 본처 외에도 많은 첩을 두었던 것처럼 정실부인이 아닌 생모 고영희의 삶을 지켜보면서 자란 김정은의 삶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김정은과 리설주 사이에 딸 김주애가 있다는 사실을 방북했던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밝힌 바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비가 딸만 낳자 후궁을 들여 세자를 낳게 했던 것이나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이성 행각을 멈추지 않았던 전례를 본다면 김정은의 여성편력도 조만간에 폭로될 날이 올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씨왕조와 김씨왕조는 너무도 닮은 봉건왕조 독재국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