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정은 집권 이후에 북한의 달라진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꼽으라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중국경을 가로 막은 철조망일 것입니다. 김정은은 왜 김일성과 김정일도 하지 않았던 국경 철조망까지 늘이면서 국경을 철저히 봉쇄하는 것일까요?
국가는 영토를 기반으로 형성되며 영토의 경계는 국경으로 구분됩니다. 현 시기에도 나라마다 인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국경지역에 무력을 증강하고 철저한 봉쇄를 해오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 지역을 통해 무역이 활성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경문제는 과거는 물론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가서도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해방 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휴전선에는 철조망이 늘어났고 남과 북의 무장군인들이 서로 대치해 긴장상태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으로 6.25남침전쟁이 일어났고 전후 휴전선에는 탱크 차단물, 지뢰 등으로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북중국경은 철조망은커녕 압록강과 두만강을 두 나라 국민들이 서로 사용할 정도로 경계가 느슨하였죠. 북중국경도시인 혜산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여름에는 압록강에서 수영하며 중국 강변에 가서 일광욕을 하다가 다시 헤염쳐 오기도 하던 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압록강 중앙에 만들어 놓은 스케이트장에서 중국사람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일들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중국에서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고 경제난으로 어려워진 북한주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도강하여 중국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빈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김씨왕조의 건강장수를 연구하는 만청산연구원에 배치되어 휴가로 고향인 혜산에 갔던 1991년 8월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름에 시원하게 압록강에 수영하러 나갔다가 한 청년이 팬티만 입은 채로 무장한 국경경비대원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죠. 수영하면서 중국에 넘어가서 강변에 앉아 있다가 돌아온 것이 죄가 된 것입니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둑에는 곳곳에 초소들이 세워져 있었고 무장군인들이 24시간 강 안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강에서 나와야 했고 저녁에는 국경경비대 외에는 누구도 강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북한주민들이 중국에 사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도강했는데, 당시에 저의 친구가 혜산과 마주한 중국 장백현에 갔다가 강에서 군인의 총창에 찔려죽는 참상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먹이를 주지 않고 자꾸 때리면 달아나지 않느냐? 옆집 강아지가 배가 불러 남긴 먹이를 먹으려고 옆집 담장을 넘어가는데 배급도 주지 않고 직장에 끌어내다가 일만 시키니 누구라도 굶어죽지 않으려고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이죠.
청취자 여러분,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이 된 이후로 고려,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국경을 봉쇄하고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기록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1869년과 1870년 연이은 흉작으로 대기근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자 사람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청나라로 갔습니다.청나라 봉건정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소위 ‘봉금선(封禁線)’을 그어놓고 도강하는 것을 막아 나섰습니다.
조선왕조에서도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합세하여 월경자들을 단속하였죠. 하지만 아무리 통제를 한다고 하여 굶어죽을 수 없었던 주민들의 탈북이 계속되었고 이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주땅이 개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양강도에서 사시는 청취자 분들은 해발고가 높은 양강도에서는 벼농사가 안되지만 북한지역보다 해발고가 낮은 만주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잘 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먼저 중국으로 갔던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면서 농사를 지어 굶주림을 면하자 소문을 듣고 친척들과 친구들이 도강했는데 역사기록에 당시 초기에 이주한 사람들만 해도 1천여 호가 넘었다고 합니다.
1878년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만주지역 개발을 위해 봉금정책을 폐지하였고 1881년에는 연변 일대를 개방하고 초간총국(招墾總局)을 설치하였고 5도구(五道溝)와 흑정자(黑頂子), 남강(南崗)에 분국을 세워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이민실변정책은 밀려들어오는 조선인들을 제한하고 한족인들을 만주지역에 모집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곳에 오면 세금감면과 농기구, 식량대여 등 일련의 우대정책을 실시하도록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청나라 정부의 이민실변정책에 호응하여 만주지역에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생사기로에 놓인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도강하여 중국으로 넘어가자 조선정부도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이재민들이 월강하여 살길을 찾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역사기록을 보면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중국 동북 경내에 들어와 토지를 개간하고 정착하자 청나라 정부는 명목상 조선인의 월경을 단속하고 이미 들어온 자에 대해서도 소환시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환영하는 태도로 이들의 이주를 묵인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청나라 봉건정부도 당시 이주해 온 수많은 조선인들을 전부 내쫓는다면 이미 개간된 토지가 황무지로 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묵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살던 조선인들은 가족을 데리고서도 하루 길이면 이주하여 올 수 있는 편리한 조건이었으므로 이들의 이주는 점점 늘어갔고 청나라 지방 관리들과 지주들도 오히려 조선 이주민을 이용하여 연변지역을 개간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청나라 길림 지방당국은 1885년에는 두만강 이북지역의 길이 350㎞, 너비 25㎞에 달하는 지역을 조선인 이주민의 ‘전문개간지역’으로 확정하였고 이때부터 조선 이주민의 동북 개척이 합법화 되었습니다.
수많은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고 수확량이 증가되었으며 수많은 곳에 촌락들과 도로들이 생겨났고 잠자던 중국의 만주지역이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살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갔습니다. 평안북도 성강군 부지리(지금의 자강도 강계시)에서 살았던 저의 할아버지도 일제강점기에 만주지역의 길림성 화룡시에 가서 약장사를 하면서 근근히 돈을 벌었다고 저의 할머님이 얘기해 주셨습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압록강과 두만강은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는 군사지역으로 변했습니다. 북한당국은 형법을 개정하면서 제47조에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에 5년이상 10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하며 정상이 특히 무거운 경우에는 사형 및 全재산몰수형에 처한다”고 명시해놓았습니다. 김정은이 국경경비대 군인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에 들어서는 주민들을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려 지금 북중국경지역은 평화시기에 피가 흐르는 살육마당으로 변했습니다.
살길을 찾아 북한을 탈북해 대한민국에 온 탈북민들이 놀라는 것은 김일성이 해방 전 5년 동안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다는 사실, 김정일이 본처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을 두었고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가 재포출신 무용수 기쁨조 출신이라는 사실, 김씨왕조의 이씨왕조를 능가한 부귀영화 등입니다.
자유를 찾고 나서 불쌍한 북한주민들을 해방해야 한다는 탈북민들의 목소리가 무서워 김정은은 계속되는 탈북을 막으려고 살인적인 국경봉쇄를 하려하지만 목숨을 건 탈북행렬은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