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김일성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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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한 첫 번째 암살시도는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에서 있었던 암살사건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당시 김일성에게 던진 수류탄을 주어 되받아 던지려다가 한쪽 팔을 잃은 소련군 장교 소비첸코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시간에는 3월 1일 김일성 암살을 조직했던 백의사와 당시의 암살 현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선전용으로 노비첸코가 김일성의 암살을 막았던 사건을 다룬 영화 ‘영원한 전우’를 제작하여 보급했지만 여기에도 누가, 왜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숨겼습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 외무장관이 참석해 3국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혹는 모스크바 3상 회의(三相會議)라고 부릅니다.

해방 후 북한주민들 대다수는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만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이 해방군의 탈을 쓴 점령군에 불과하다고 재삼 강조하였고 1945년 12월 신탁통치를 공식화 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1946년 1월 4일에 모스크바 3상 회의를 논의하기 위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개최해 소련주둔군 장교들과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자신이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찬동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4개 조항에서 3번째 조항은 미국과 영국, 소련과 중국이 남과 북을 따로 5년 동안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만식 선생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련군을 사촉해 그를 연금하도록 했습니다.

민주당 당수였던 조만식 선생이 연금되자 김일성은 그를 따르던 인텔리들과 민주당 지지파 청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무산혁명완성을 떠들며 지주, 자본가들의 재산과 토지를 마구 약탈했으며 이런 계기로 하여 많은 애국청년들이 월남했습니다. 소련군정은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3.1절 경축대회를 대규모적인 정치행사로 조직해 북한 내에서 팽배해진 반공분위기를 해소해보려고 꾀했습니다. 해방이 되어 7개월이 되어오던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에는 소련군정과 북조선공산당의 지도하에 평양시민들과 각 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 농민, 학생들로 꽉 들어찼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이 기록한 자료들에는 오전 11시가 가까워오자 광장은 군중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3.1절 경축 기념행사는 예정대로 오전 11시 정각에 시작됐고 주석단에는 소련군정 25군 참모장 올레그 펜콥스키 중장, 정치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등 소련군 고위장성들과 당시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 김책,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최용건,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오기섭, 여성동맹위원장 박정애, 사법국장 최용달 등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일성과 소련군정 간부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주석단 주위는 정복과 사복을 입은 50여 명의 소련군 군인들과 보안대원 무장인원들이 배치되었고 광장둘레에도 수백여 명의 경호인력이 배치되었습니다.

북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 김두봉의 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연설을 했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총무부장 이주연이 업무보고를 마치고 시가행진에 돌입하려는 순간, 백의사 대원 김형집이 김일성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주석단 계단에 떨어진 수류탄을 소련군 소위였던 노비첸코가 주어서 되던지려 했으나 그의 손에서 폭발해 오른손이 날아가고 왼손 뼈와 발가락이 파열되었으며 혼비백산한 김일성은 피신했습니다.

당시 3.1절 경축 기념행사에서 일어난 이 광경에 대해 소련군정 정치담당관이었던 메클레르는 “김일성 연설도중 계단 경비를 맡은 노비첸코 소위가 한 청년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노비첸코가 계단에 걸터앉으려는 청년을 제지하자 청년은 ‘우리의 3·1절 행사에 소련군인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나와있느냐’며 대들었고 조선말을 할 줄 아는 메클레르가 ‘우리는 너희들의 조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해방군’이라며 그 청년을 밀어냈다”고 증언했습니다.

잠시 후 바로 그 청년이 수류탄을 던졌는데 노비첸코는 시비를 걸었던 그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떨어진 수류탄을 민첩하게 주어 김일성이 암살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속의 특무대와 보안대는 총동원되어 이 사건의 주동자를 검거하고 용의자로 보이는 40여 명의 청년들을 검거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진 김형집은 당시 19세 열혈청년이었습니다. 김일성 암살에 나섰던 김형집과 김정의, 최기성, 이희두는 모두 평양출신이었는데 1945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소련군정과 북조선 임시정부의 탄압에 못 이겨 서울로 월남했다가 김일성을 암살할 목적으로 1946년 2월 중순 경에 평양으로 갔던 것입니다.

김일성 암살일행은 이미 평양에서 활동하던 평양공업전문학교 출신인 정치공작대 대원 선우길영(당시 24세), 그의 동생 선우대영(당시 21세), 평양고등학교 출신인 평남 임시인민위원회 총무부 정보과에서 근무 중이던 조재국(당시 20세)의 협조를 받아 평양보안서 뒤편에 있던 장대현교회 홍민규 장로의 저택을 은신처로 정했습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반공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활동하던 애국청년조직인 남의사의 명칭을 본따서 설립한 백의사(白衣社) 조직 성원들이었습니다. 백의사는 1945년 11월 염동진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애국청년단체입니다. 35세 되던 1943년에 평양에서 항일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을 결성한 염동진은 해방 후 소련군정의 감시가 심해지자 서울로 월남해 대동단을 백의사로 개명하였습니다. 북한출신 청년들로 조직된 백의사는 명칭 그대로 백의민족을 상징하였고 소련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하수인으로 전락된 김일성세력을 척결하는 것을 활동목적으로 정했습니다.

암살계획은 김일성이 연단에서 연설을 시작하면 김형집이 수류탄을 던지고, 최기성과 이성열은 권총으로 저격하기로 했습니다. 세 사람은 연단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군중을 뚫고 들어갔고 김형집은 몸에 숨겼던 수류탄을 던졌지만 노비첸코가 집어던지다가 폭발해 김일성은 암살을 면했던 것입니다.

김형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최기성은 김일성이 이미 연단 밑으로 사라져 권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의 암살이 실패하자 당시 39세였던 김정의(가명 김제철)은 평양에서 이희두와 최의호 등 애국청년들로 결사대를 조직했고 이들은 최용건과 김책, 강양욱을 암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일성의 암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1946년 3월 5일과 3월 7일에는 최용건 자택습격을, 1946년 3월 9일에는 김책 자택습격을, 1946년 3월 12일에는 강양욱 자택습격을 강행했으나 3.1절 경축 기념대회 때 김일성 암살사건으로 긴장해진 소련군과 북한 보위대의 철통같은 경비로 결국 실패했습니다.

백의사와 애국열혈청년들의 김일성 암살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공산독재를 반대하는 애국국민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3.1절 김일성 암살사건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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