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 여러분,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도강하여 탈북한 여성의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 중에 2만여 명은 이미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살고 있지만 아직도 수십만 명의 여성들을 중국의 동북 3성과 천진, 베이징등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숨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북송되면 노동교화소에서 징역살이하거나 시범케이스로 처형될 수도 있기에 중국인들에게 원하지 않는 시집을 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 여성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신 같은 국가 지도자가 있고 위대한 노동당이 있지만 배급도 제대로 주지 않아 살길을 찾아 중국에 가야 했고 결국 그들에게 차려진 것은 불법 체류자의 삶이죠.
중국내 탈북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수백 년 전 강제로 중국에 끌려갔던 공녀들이 떠오릅니다. 공녀는 고려시기와 조선시대에원나라와 명나라에 섬겨 바쳤던 여자들을 말합니다. 공녀는 공물로 바쳐진 여자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공녀제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으며 조혼(早婚)풍습도 공녀 차출이 빚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기와 이조봉건시대 공녀의 대량 유입으로 중국의 궁중과 상류층들에서는 후궁으로 조선 여성을 들여야 비로소 유명한명가(名家)로 인정될 정도였다는 것은 명나라 권형(權衡)이 편찬한 경신외사(庚申外史)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이 책에 조선 여인들이 중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총애를 받았던 이유는 성격이 온유하고 미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윗사람도 잘 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죠. 이런 이유로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 여인들을 요구했고 원나라가 패하고 명나라가 세워지자명나라 조정에서도 조선 여성들을 공녀로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조봉건시기 기록한 세종실록에는 ‘다반(茶飯)을 지을 줄 아는 부녀 10명을 가려 뽑아서 북경으로 가게 했고 그들의 화명(花名)을 한사람 한 사람씩 열거한다’며 ‘소옥(小玉), 중금(重今), 조운(朝雲), 보대(寶臺), 진주(眞珠), 연연(娟娟), 계화(季花), 선장(善莊), 수정(守貞), 연아(燕兒)’ 등 소녀들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추원 부사 이맹진(李孟畛)을 임명하여 해청(海靑) 5연과 집찬비자(執饌婢子) 보금(寶金) 등 20명을 장차 진헌(進獻)하기 위하여 중국 사신과 같이 북경에 가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수많은 조선 여성들이 중국 명나라 봉건통치배들의 공녀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기 1275년에 10명의 공녀를 보낸 것을 시초로 하여 공민왕 초기까지 80여 년 동안 수많은 여자를 원나라로 보냈고 그 시기에보내진 횟수만 해도 50여 회가 넘는다는 내용도 옛 기록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죠.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은 40세가 다 되는 나이에원나라 황제인 세조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원나라 부마가 된 충렬왕과 원나라 세조의 딸 사이에 아들 충선왕이 태어났고 고려의 원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더 노골화되었죠. 충렬왕은 고려 봉건왕조 사대부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소녀들은 모두 관에 보고하게 하였고 혼인하지 않은 10대의 소녀들을 뽑아 원나라에 공녀로 섬겼습니다.
당시 공녀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하였고 공녀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서두르는가정들이 많아지면서 조혼 풍습이 생겨났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가정들에서는 딸의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절에 가도록 했죠. 공녀로 끌려가는 것에 반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소녀들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원나라에 끌려간 공녀들 가운데는 노비로 전락해서 저잣거리에서 물건처럼 판매되는 소녀들도 있었습니다.
고려 말기 1369년에 18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던 권근(權近)의 시에는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구해야 하고 해가 저물면 소녀를구하는구나, 부모와 이별하려니 말이 멈추지 않고 눈물을 참고 닦아도 다시 떨어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중국에 공녀로 끌려가는 여성들과 그의 부모들의 애절한 마음을 반영한 시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조선여성 출신의 공녀 중에는 원나라 봉건사회의 황제와 귀족 상층부의 궁인 또는 시녀로서 상당한 활약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원나라 순제(順帝) 황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열네 살 꽃다운 나이에 중국으로 떠난, 고려의 무관이었던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인 기황후는 처음에는 원나라 황실에서 황제의 시중을 들었고 원나라 11대 황제 순제의 눈에 들어 후궁이되어 1339년에는 원나라 황후가 됩니다.
당시 중국의 원나라 시인 양윤부는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뺨, 버들가지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기황후의 용모는 출중했었죠.
고려의 여인 기황후가 득세하자 원나라에 불어 닥친 고려 열풍으로 많은 여성이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고 고려의 28대 왕이었던 충혜왕은 자기의 딸인 장녕공주도 원나라 노왕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14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쇠퇴해진 원나라가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붕괴하고 명나라가 세워지자 고려의 31대 왕인공민왕은 1371년에 밀직부사 주영찬의 딸을 명나라 황실의 궁녀로 보낸 것이 명나라에 대한 공녀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명나라에 대한 공녀 차출이 시작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지게 되었죠. 명나라는 1408년 이조봉건시대 3대 왕인 태종왕 이방원 시기부터 이조 11대 왕인 중종왕 시기인 1521년까지 공녀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렇듯 고려시기부터 이조봉건시기에 이르는 동안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선여성들을 서슴없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중국 봉건관료들의 후궁으로 섬겨 바쳤습니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도 중국에서 북한 여성들이 공녀보다 더 처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기 배급도 끊기고 굶어 죽지 않으려는 북한의 여성들의 생사를 건 탈북을 시작했습니다.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활성화된 중국에 가면 얼마간의 돈이라고 벌 수 있고 그러면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압록강과두만강을 도강해 중국에 갔던 여성들은 공안에 체포되지 않으려고 숨어서 일할 곳을 찾았죠. 그러나 나쁜 마음을 먹은 브로커들에 의해 중국에서 장가를 가지 못한 남성들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면서 북한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지금도 정체를 숨긴 채 중국의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는 북한 여성들은 중국인 남편에게서 폭행을 당해도 공안에 신고할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만약 북한 여성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북송되어 북한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기에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인 것이죠.
강제로 결혼하여 중국 남성의 애를 낳았지만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고 공안에 체포되면 사랑하는 자녀와 생리별하고 북한에 끌려가야 하는 그들의 처지는 고려시대와 이조봉건시대의 공녀들의 삶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단 한 명도 북한으로 월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3만5천여 명의 탈북민이 살고 있고 그중에 2만 명이 넘는 탈북 여성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중국인 남편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서 모진 폭행으로 시달리다가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한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중언을 통해 중국에서 탈북 여성들의 비참한 삶이 전 세계에 공개되고 있죠.
이들의 증언을 듣고 있노라면 인민을 위한다는 김정은과 북한 정권의 반인민성을 다시금 뼈저리게 절감하게 됩니다. ‘여성은 꽃이라네’ 같은 노래 가사와는 판이한 북한의 여성멸시정책과 조선시대 공녀보다 못한 중국에서의 탈북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면 북한 김정은 현대판 봉건왕조국가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반동적인 체제임을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