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재(呈才)와 왕재산경음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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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저는 북한의 왕재산경음악단이 짧은 치마를 입고 무대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CD가 비밀리에 유포되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정재가 떠오릅니다. 정재는 조선시대 궁중무용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발전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문화예술을 향유함에 있어 부자와 서민이 따로 없으며 대통령이나 고위 간부를 위한 특수한 예술단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봉건왕조 국가들에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존재하다 보니 지배계층이 향유하는 궁중문화가 따로 있어 일반인들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판 봉건왕조 국가인 북한에도 김씨 일가와 특권층들을 위한 예술단체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왕재산경음악단이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일반 주민들이 몰래 보았던 CD 속 왕재산경음악단 무용배우들이 반나체 의상을 입고 추던 춤이 김정일과 고위 간부들을 위한 공연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시대 궁중무용이었던 정재에 대해 살펴보고 현대판 왕조국가인 북한 왕재산경음악단의 특별공연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를 계승하여 14세기 말에 건국된 조선 시대에는 정재(呈才)라 불린 궁중무용이 발전하게 됩니다.

조선 전기에만 악기의 종류는 60여 종에 달하며 기악(器樂)과 더불어 궁중무용이 크게 발전합니다. 대표적인 악기들로는 대금, 퉁소, 피리, 나각, 아쟁, 해금, 거문고, 비파, 공후, 대금, 징, 절고, 소고 등입니다. 또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을 비롯해서 악기(樂器), 악곡(樂曲), 악보(樂譜)에 이르기까지 음악 예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면서 궁중무용의 기초가 확립되어갔습니다.

이런 악기의 발달로 궁중무용은 번성했고 노래와 춤, 기악을 동반하는 종합 가무극(歌舞劇) 형식으로 점차 우아하고 유연하며 화려한 가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 중기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의 방탕한 생활로 하여 궁중무용에 종사하는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왕재산경음악단의 배경도 김정일의 방탕한 생활이었습니다. 김정일에 의해 왕재산경음악단 무용배우들이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있는 중앙당 내부의 목란관과 전국 도처에 있는 김정일의 별장인 초대소들에서 반나체로 춤을 추어야 했고 이 공연 장면들이 CD로 유포되자 북한 당국이 통제하기 시작했죠.

김정일과 특권층 고위 간부들만이 즐기던 왕재산경음악단 무용배우들의 춤동작이 어떻게 촬영되어 CD로 편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장마당들에서 장사꾼들에 의해 통제를 피해 판매되기도 했고 아는 지인들 사이에 유포되어 북한 주민들이라면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추었던 무용 중에 ‘유쾌한 춤’이나 ‘이 밤이 좋아’, ‘달리는 마음’, ‘알로하오에’는 무용수들이 그래도 배꼽을 가린 의상에 짧은 치마를 입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드는 춤동작을 했다면 무용 ‘마리돈’은 무용수들이 팬티 같은 짧은 바지에 배꼽을 드러내고 가슴만 가린 상의를 입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모습이어서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죠.

무용수들이 수영복 같은 의상을 입고 배꼽을 드러낸 채 빠른 박자의 미국 디스코 음악에 맞춰 엉덩이와 가슴을 심하게 흔들고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거나 벌리는 모습은 그 전에 어디서도 볼 수 없었으니 그럴 만 했습니다.

그러면 김정일이 북한 주민들에게는 공개하기를 꺼렸던 현대판 김씨왕조 궁중무용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조선 시대 궁중무용인 정재에 대해 더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가 붕괴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건국이념인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 문화, 사회 등의 모든 분야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고 궁중 내부의 시스템도 새롭게 갱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도전에 의해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납씨곡(納氏曲)․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 등 신악(新樂)이 창작되어 왕궁에서는 노래와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궁중무용으로 왕과 신하들의 쾌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1493년에는 성종왕에 의해 가사가 한자가 아닌 우리글로 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편찬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당시 궁중 무용수들이 춤을 출 때 불리던 노래들인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처용가(處容歌)’ ‘여민락(與民樂)’ ‘봉황음(鳳凰吟)’ ‘북전(北殿)’ ‘문덕곡(文德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의 노래가사가 한글로 기록되어 있고 궁중의식에서 연주하던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에 관해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악기, 의상, 무대장치 등의 제도, 무용의 방법, 음악이론 등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조선시대 10대왕이었던 연산군이 1504년에 ‘흥청악(興淸樂) 300명, 운평악(運平樂) 700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廣熙)도 또한 증원하라‘고 하명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과 봉건관료들을 위해 정조를 바쳐야 했던 흥청이들과 궁중무용을 위해 종사했던 여성의 숫자가 점차 많아지면서 수천 명에서 거의 만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연산군은 전국의 얼굴이 예쁘고 춤을 잘 추는 기생들을 뽑아 궁중 안에 들이도록 했습니다. 이름난 기생들인 명기(名妓)들은 물론 서민 집의 딸과 아내, 벼슬아치의 첩과 몸을 팔던 기생들인 창기(娼妓)들도 인물이 곱고 춤을 잘 추면 뽑혔는데 이들을 연산군은 운평(運平)이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들 중에서 춤을 잘 추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운평은 악공인 광희(廣熙)라고 불렸고 이들이 궁중무용인 정재를 담당했죠. 인물은 고우나 예술적인 감각이 무딘 운평들은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되었는데 이들을 흥청(興淸)이라고 불렀습니다.

초기에 1천여 명에 불과했던 운평은 얼마 후에는 9천여 명으로 늘었고 선발된 운평들에는 등급이 매겨졌습니다. 마치 북한의 왕재산경음악단과 만수대예술단 등에서 김정일의 밤파티에 불려가 춤을 추었던 배우들도 인민배우, 공훈배우로 불리워지듯 말이죠.

또 연산군은 처음으로 선발된 운평을 ‘가흥청(假興淸)’이라고 부르게 했고 한 단계 승급시키면서 ‘흥청’이라고 했으며 이들 중에서 임금 곁에서 모시는 자는‘지과흥청(地科興淸)’, 잠자리를 같이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구인 장악원을 연방원(聯芳院)으로 개칭하고 흥청이들을 원각사에 둔 연방원(聯芳院)과 궁궐 안에 둔 취홍원(聚紅院)에 거처하게 했습니다. 부족되는 숙소를 보충하기 위해 개인집들을 빼앗아 함방원(含芳院), 진향원(聚紅院) 등으로 부르도록 했고 이곳에도 흥청이들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연산군 시절이 과했을 뿐 다른 조선의 왕들도 궁중무용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지방들에도 대상자들을 뽑아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여성들을 선출해갔습니다. 북한의 중앙당 5과가 항시적으로 지방 예술전문학교들에서 대상자들을 선출하던 방식과 너무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죠.

당시 궁중무용수들에 대한 국가적인 혜택도 당시로써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의상과 음식 등 모든 것은 백성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현대판 봉건왕조국가인 김씨왕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주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왕재산경음악단 무용수들의 의상과 그들에게 제공되는 식량 배급과 공급물자 역시 북한 주민들의 피와 땀이죠.

북한에서 딸을 가진 부모들이 중앙당 5과에 자녀를 보내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김정일과 특권고위층 간부들의 성 노리개로, 진수성찬에 거나하게 취한 그들에게 반나체 의상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춤이나 추면서 웃음을 선사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도 모란봉악단, 청봉악단이 김정일 시대 왕재산경음악단을 대신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의 정재가 여전히 현대판 김 씨 왕족 독재국가인 북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수치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현주,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