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돌 열병식에서 육군 군단급 부대들이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을 지나갈 때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에서 “서남 관문을 믿음직하게 지켜나가는 4군단, 군단장 박광주 상장”, “북부지대의 난공불락 요새 9군단, 송영근 중장”, “동쪽 관문의 10군단, 군단장 이용철 중장” 등의 방식으로 군단들과 군단장들을 상세히 소개했죠.
그러나 6군단은 1995년 ‘6군단사건’이 발생하면서 해산해버렸기에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열병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6군단사건은 함경북도와 양강도 일대를 위수하고 있던 6군단 정치위원을 비롯한 군단의 고위급 군관들이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입니다.
김씨왕조시기의 6군단 사건처럼 500여년 전 이조봉건시기에도 이 일대에서 이징옥 반란군사건, 이시애 반란군사건 등 군인들의 반란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듯 함경도 지역에서 이조봉건시기와 김씨왕조시기에 발생한 반란사건을 통해 두 봉건왕족시기의 군인 쿠데타 사건의 진상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함흥과 경성, 두 도시의 이름을 붙여 함경도라고 부르지만 500년 전에는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서 함길도라고 불렀습니다. 이조봉건왕조시기 첫 반란은 1453년에 있었습니다. 당시 반란을 주도한 이징옥(李澄玉)은 함길도 도절제사였습니다. 도절제사는 지방의 무관 관료를 이르는 말입니다. 세종대왕시기부터 왕의 신임을 받아왔던 이징옥은 문종왕에 이어 단종왕시기에도 신임을 받고 함길도 도절제사를 역임했던 인물이죠.
문종왕이 죽고 그의 아들 단종왕이 왕위를 잇자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가 조카인 단종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종서와 이징옥 같은 단종왕의 충신들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당시 조선의 최고 장수인 김종서와 이징옥이 수양대군의 표적이 됩니다. 수양대군은 그해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왕의 충신들을 죽이고 함길도 도절제사인 이징옥도 불러들여 제거하려고 꾀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이 한양에서 김종서를 비롯한 충신들을 죽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징옥은 박호문(朴好問)이 그의 후임으로 함길도에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내려오자 그에게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길주(吉州)에 있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죽고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돌아가 부임되어 왔던 신임 함경도 도절제사 박호문을 죽이고 각지에 군사를 일으키라는 통문을 보냅니다. 당시의 이징옥 반란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양대군이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이고 도망하자 함길도 관찰사 성봉조(成奉祖)에게 잡아 죽일 것을 하교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 도관찰사는 현재 북한의 도당책임비서와 같은 직책의, 중앙에서 파견하는 도내 최고 관료입니다.
수양대군은 당장 이징옥과 반란군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고 하명했고 종성지역(지금의 함경북도 종성군)에 주둔하면서 반란을 준비하던 이징옥은 자기의 수하 군사인 이행검과 정종에 의해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됩니다. 수양대군의 하명으로 살해된 이징옥의 시신은 각을 찢는 거열(車裂)형에 처해졌고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장대에 매달아 일반 백성들에게 공개하는 형인 효수(梟首)에 처해졌죠.
그때로부터 13년 뒤인 1467에 함길도 지역에서 또다시 이조봉건왕조를 거역하는 이시애 반란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자기의 조카 단종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세조왕으로 불리며 온갖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또다시 함경도지역에서의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크게 놀라게 됩니다.
무관인 함길도 첨절제사였던 아버지 이인화(李仁和)의 아들인 이시애(李施愛)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4년이 지났던 1458년에 경흥진 병마절제사 등 함길도 지역에서 국경을 지키는 군사의 무관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세조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함길도 지역의 북방민 출신의 등용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정일 시대에 노동당 고위간부들과 인민군 내 장성들 속에 함경도 출신의 비중이 많다며 간부사업을 제한했던 것과 너무도 같은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세조왕은 전국적으로 호적을 개정해 호패제도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1465년에는 지방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세력가들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보법(保法)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지방 세력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농민들에게도 과중한 부담을 안겨 농업생산의 감퇴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특히 지역적 특성으로 농사가 잘 안 되는 함길도 지역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의 반감이 격화되었고 당시 반자치기관의 성격을 가진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반정부활동들이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467년 함길도에서 유명한 집안출신인 이시애는 동생 이시합(李施合)과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모의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시애와 반군세력은 남쪽지역의 군사가 육로와 바다를 통해 함길도로 쳐들어와 함길도 군사와 백성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시켰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북한에서 배운 것처럼, 6.25남침전쟁을 김일성이 일으키면서 남조선 군대가 먼저 북조선을 침략했다고 했던 거짓선전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애 반란군은 당시 함경도지역의 군사들을 통솔하던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휘하 군관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당시 반란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 ‘1467년 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 사람인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반역(不軌)을 모의하고, 먼저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평사 권징, 판관 박순달 등을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조왕의 하명으로 관군이 이시애 반란군에 대한 토벌에 나섰고 이에 맞서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관군에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이시애는 토벌군 진지 앞에서 목이 잘려 죽음으로써 3달 동안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 반란사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500년이 지난 북한에서 1995년에 발생한 6군단 사건도 어떻게 보면 가장 열악한 함경도 지역 군인들과 지역주민들의 노동당과 김씨 왕족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마고원을 끼고 있어 추운 날씨로 농사도 잘 안되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복귀하자 함경도지역의 공업은 여지없이 파괴되었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6군단 정치위원은 군인들의 식생활을 위한다며 외화벌이에 집중하도록 했고 1995년 1월에 군단장이 죽고 새로 발령되어 내려온 군단장 김영춘과의 갈등이 커졌습니다. 김영춘 군단장은 6군단 정치위원과 군단 고위 간부들이 노동당과 인민군 총참모부의 지시를 거역하면서 외화벌이를 빌미로 남조선과 내통한다며 당시 인민군 총참모부 원응희 보위국장과 함께 김정일에게 제의서를 올렸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95년 말에 6군단 정치위원을 비롯해 40여 명의 군단 고위군관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쿠데타 공모자로 수백 명이 정치범수용소와 탄광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당시 6군단 군인들은 밤마다 화물열차에 실려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했고 함경도 지역에는 새로운 군단인 9군단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6군단사건을 적발해낸 공로로 군단장 김영춘은 1995년 9월에 차수칭호를 받았고 인민군총참모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렇듯 이조봉건시기의 함길도 지역에서 있었던 이징옥, 이시애 반란사건은 현대판 왕조국가인 북한의 6군단사건과 같은 지역이고 왕권유지를 위해 처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도 닮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왕권권력 유지를 위해 살벌한 공포정치를 하고 있지만 독재자의 말로는 죽음으로 끝나듯이 역사의 진리는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