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군과 중공군의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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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일본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을 때 당시 중국의 명나라가 20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조선에 보내주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물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때로부터 358년이 지난 1950년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돕기 위해 모택동이 240만여 명의 중공군(중국인민해방군)을 한반도에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기에 파견되었던 중국 명나라군과 6.25남침 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에 대해 학살, 고문, 강간, 강탈 등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고 있죠. 그래서 오늘은 명나라군이 당시 행했던 민간인 학살과 6.25 전쟁 시기 참전했던 중공군의 만행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몽골의 칭기즈칸(칭기스한)에 의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에 몽골족의 왕국인 원나라가 세워졌습니다. 1271년부터 1368년 사이에 몽골의 지배를 받던 중국이 주원장에 의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明)나라를 세웠습니다. 원나라의 멸망, 명나라의 등장과 함께 한반도에서도 고려가 멸망하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등장하게 되죠.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200년이 되던 1592년, 조선 제14대 선조왕 시기에 20만여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를 침략하였습니다. 임진년에 일본군이 침략했다고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불리는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조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군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17만 명에 달하던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농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다 보니 3만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오히려 조선반도에는 명나라군이 11만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명의 개입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야망은 실현될 수 없었지만 7년간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명나라군의 도덕적인 해이와 일탈로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이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지속한 원인에 대해 명나라군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명나라군의 심각한 약탈과 부실한 군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곳곳에서 백성들은 일본군과 함께 중국 명나라군도 두려워한 걸 보면 명나라군의 실상을 잘 알 수 있죠.

조선시대 선조왕 시기, 왕을 수행하였던 재상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역사 도서 ‘징비록’에는 명나라군이 조선의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굴어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조왕조실록에도 중국 명나라군이 민간인들을 마구 끌어다가 노역을 시키는가 하면 사대부 집에 뛰어 들어가 강도질을 하거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명나라군의 민폐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당시 조선 선조왕은 저들의 왕권 유지를 위해 일본의 침략에 중국 명나라 군을 끌어들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침략군인 일본군과 함께 중국 명나라군도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선조실록에는 임진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2월에는 명나라 군인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해 명나라군이 온다는 풍문만 들어도 백성들이 숨기에 바빠 사방 30~40리의 마을이 텅 비어있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중국 명나라군 지휘부는 전투 평가를 병사들이 적의 목을 벤 숫자로 평가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군을 죽이는 대신 조선백성들의 목도 수없이 잘렸습니다. 선조실록에는 1593년 1월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중국 명나라 파병군 총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의 부대가 전투에서 목을 벤 수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었고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백성도 1만여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같은 명나라군의 만행에 대해 그 어떤 방책도 세우지 못했죠. 이조왕조실록을 보면 1595년 12월, 병조판서 이덕형이 선조왕에게 “명나라군이 군사훈련을 빙자해서 갖가지 민폐를 일으키고 있다”고 아뢰자 선조왕은 “지금은 괴롭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 중국만 믿을 뿐이다. 중국의 노기를 적발시키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된다”는 말로 달래기만 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왕권 유지를 위해 백성이 죽든 말든 중국 명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성들이 피해를 본 것과 같은 일이 김일성에 의해 1950년에 재현되었죠. 김일성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구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찾아다니면서 전쟁을 승인받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전 전선에 걸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소련군 문서들과 당시 자료들을 통해 낱낱이 공개되었습니다.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기회를 틈타서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고 했으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지원요청을 했고 1950년 10월 19일을 시작으로 전쟁 전체 기간에 약 240만 명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습니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강도 만포시 고산진으로 도망쳐 이곳에 전선사령부를 정하고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지금도 당시 전쟁을 일으키고 동족상잔으로 같은 민족, 한겨레를 무자비하게 죽인 북한 인민군에 대한 원한과 김일성의 적화통일 실현을 위해 참전했던 중공군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는 여전합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 시기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관련 유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과정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건수만 해도 1,687건이 접수되었죠. 그리고 중공군 등 민간인 학살 만행은 유엔 총회의 문건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5개월 후인 1953년 12월 3일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전쟁 당시 인민군과 중공군이 유엔군 포로와 한국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각종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결의안에는 “유엔이 한국에서 침략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지역 안보를 복원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던 도중 인민군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며 “이들 만행은 유엔군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저질러졌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조사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결의안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유엔군과 한국 민간인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붙잡힌 뒤 구타, 고의적으로 계획된 굶주림, 냉혈적인 고살, 신체 절단, 고문 등으로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 국방부 키스 차관도 “인민군과 중공군의 만행은 유엔군 포로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졌다”며 “상당수의 만행은 유엔군이 진격할 때 이뤄진 것으로 공산당에 잡혀있던 유엔군 포로들과 민간인들은 구출되기 전에 피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스 차관은 미 국방부가 조사한 내용을 공개했는데 당시 중공군 피해자 2만 9,815명 중에 민간인 피해자만 해도 1만 7,354명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중공군의 만행은 당시 포로로 잡혔던 유엔군 용사의 증언을 통해 발간된 도서 ‘터키인이 본 6·25 전쟁’이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책에는 ‘중공군에게 잡혀 수용소에 가둬진 유엔군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됐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습니다’라고 증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조선왕조가 저들의 왕권 유지를 위해 끌어들인 중국 명나라군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약탈, 고문, 처형, 겁탈 등을 자행한 행위나 지난 6.25남침 전쟁 시기 김씨 왕조의 권력 유지를 위해 끌어들인 중국인민지원군의 민간인 만행은 너무도 닮은 모습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평양시 중심에는 우의탑을 세우고 북한 곳곳에는 중국인민지원군 묘지들을 만들어놓고 거짓 역사를 선전하고 있지만,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오중석, 웹팀: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