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 여러분, 오늘은 북한에 있는 중국유학생들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폭력적인 사건에 대하여 말씀드리려합니다. 이야기에 앞서 청취자분들의 이해를 도모할 목적으로 북한의 유학생 관리 실태에 대하여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해방 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시작으로 여러 대학들을 신설한 북한은 교육운영에 필요한 교수진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교수진 확보와 국가건설을 위해 북한은 유능한 인재들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나라들에 유학생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북한의 유학생 파견방식은 개인이 아닌 국가가 주도하였기에 필요한 자금도 국가가 보장했습니다. 학생들은 무료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초기 북한은 중국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유학생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유학생 교환제도는 북한의 우수한 학생들을 필요한 국가에 파견하는 대신 같은 인원의 해당 국가 학생들을 북한에 받아 들여 무료로 교육시켜주는 제도입니다. 이런 유학생 교환제도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1946년에 처음 249명의 학생들을 소련에 유학생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주체사상 창시자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과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를 지내다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선생도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부 유학생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 1950년대 중반 소련공산당을 장악한 흐루시초프가 공산주의 독재를 강하게 비판하자 북한에서도 연안파였던 부주석 최창익과 윤공흠, 김두봉, 오기성을 중심으로 김일성의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반란이 있었습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알려진 이 반란사건이 실패하면서 북한 권력 내에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됐습니다. 당시 숙청된 사람들 중엔 자녀들을 동유럽 국가에 유학 보낸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해외에서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1956년 북한이 동유럽과 중국에 파견한 유학생 수가 6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동유럽에 파견되었던 수많은 북한의 유학생들이 망명의 길에 오르자 김일성은 이들 유학생들을 강제로 송환하였습니다.
강제 귀국된 유학생들 중 소수만이 다시 유학생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지만 사상검증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 70% 이상의 유학생 수천 명은 농촌으로 추방되거나 일부는 당시 북창지구에 처음 만들어진 정치범관리소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유학생 파견에 소극적이던 북한 당국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최첨단과학 발전을 강조하자 전자공학과 생물공학, 열공학, 군사분야를 위주로 자연과학 분야에 다시 유학생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부터 활기를 띤 유학생 파견사업은 1984년 5월 김일성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방문을 계기로 더욱 규모가 커졌습니다. 당시 북한은 해마다 600명 정도씩 유학생을 선발했는데 그러다보니 해외에 파견된 유학생들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동시에 북한은 동유럽사회주의 나라들과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유학생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과 '3대혁명 소조' 생활을 하던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북한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북한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한 국가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인 유학생 기숙사는 국내 대학생 기숙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동에 유럽식으로 지은 3층짜리 건물이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기숙사는 425문화회관에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들어가는 '1호도로'를 건너 평양시 대성구역 룡북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 7동으로 형성되었는데 외부 인원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2.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막혀 있었습니다.
외국인 유학생 기숙사와 북한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따로 분리시킨 원인은 서로 만나거나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학생 기숙사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파견된 보위원들이 24시간 감시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외국인 기숙사 주변에 얼씬도 할 수 없었는데 실수로 외국인 기숙사에 접근하면 그날로 국가보위부에 끌려가 조서를 쓰고 구속돼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허용된 대학생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허용되고 기숙사도 함께 쓰는 대학생들을 북한에서는 '동숙생(同宿生)'이라고 불렀습니다. 북한의 유학생 기숙사는 2인용 침실들로 구성되었는데 유학생 1명은 반드시 북한의 대학생 1명과 동숙하면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은 늘 외국 유학생들의 편의를 봐주고 조선어 공부를 돕기 위해 동숙생을 허락한다고 했지만 그런 선전을 믿는 대학생들은 없었습니다. 이들 동숙생들은 유학생의 생활을 낱낱이 파악해 대학 보위부 담당보위원에게 보고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동숙생은 북한 보위부의 정보원들이었습니다. 저와 한 고향에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황용철이 중국 유학생과 생활하는 동숙생이었는데 방학때마다 저의 집에 놀러와 유학생 기숙사의 내막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김일성종합대학에는 중국 유학생 30여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합대학 어문학부와 역사학부, 철학부, 정치경제학부를 비롯해 주로 사회학부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부는 평양음악무용대학, 평양상업대학, 평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1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서 조선어를 먼저 배웠습니다.
저의 친구인 황용철은 어문학부 신문학과를 다녔는데 그의 아버지는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습니다. 1984년경으로 기억되는데 평양미술대학에 온 중국 유학생 여러 명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서 1년간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짬짬이 모란봉이나 대성산 등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며 풍경화를 그려 기숙사 벽에 걸어 놓았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가 있는 벽에도 걸었습니다. 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김일성의 초상화보다 더 높은 곳에 걸기도 하였습니다.
전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일반 가정집에 자기나라 국가지도자의 초상화를 걸어 놓지 않습니다. 국가지도자와 찍은 기념사진이 있으면 붙여놓기도 하는데 그래도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처럼 늘 가정에 모시고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중국 유학생들이 걸어놓은 그림을 동숙생들은 내리고, 다시 걸면 또 내리고, 이런 신경전이 서로를 자극해 결국 패싸움으로 번졌습니다. 30여 명에 달하는 북한의 동숙생들과 중국 유학생들이 몰려들어 패싸움이 거칠고 커지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커지자 유학생 기숙사 당위원회에 보고되었고 중국 대사관에서 대사와 공사가 급히 찾아왔습니다. 패싸움은 멈추었으나 북한의 동숙생들이 대다수 제대군인들이었던 관계로 나이 어린 중국 유학생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사건 전말을 다 듣고 난 기숙사 당위원회와 중국대사관에서 화해를 목적으로 중국 유학생들과 북한 동숙생들 모두를 참석시켜 만찬을 조직했습니다. 그 후 중국 유학생들은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있는 벽에 다시는 그림들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대학당위원회에서는 초상화가 걸린 벽에서 그림을 내리도록 요구했던 동숙생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신 중국 유학생들은 북한의 동숙생들과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초상화가 걸린 벽에 그림을 붙이겠다는 협박을 들이대곤 하였습니다.
최근에도 북한은 두만강 홍수로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끝까지 지켰다는 인물들을 적극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우상을 더 존중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라고 북한을 낙인찍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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