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친위대원 사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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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에 이은 김정일로의 후계세습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은 1980년대 말에 있었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반김정일 투서사건, 1990년대 초 구소련의 프룬제 군사아카데미(군사대학 박사원) 유학생들의 구테타 음모사건 등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반김정일 투서사건은 1988년에 당시 김대 재학 중이던 졸업학년 학생들이 평양시 구역체신소(우체국)들에 김정일을 반대하는 투서편지를 넣어 북한정권과 김정일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건입니다. 편지에는 다른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볼 수 없는,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봉건왕조 세습독재를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편지에서 ‘한 사람을 위한 노래, 한 사람을 위한 문학’은 현 시대에 있을 수 없는 독재사회의 진면모라고 비난했습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 국민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과 공산독재의 반인륜성을 깨닫고 자본주의로 복귀했던 1980년대 말에 러시아 군사대학에서 박사원을 다녔던 군 장성들을 집단 처형한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사건’은 비밀이 아닌, 북한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당시 김정일은 자본주의로 복귀된 구소련에서 군사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유학생들을 강제로 귀국시켰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공산독재의 모순과 북한체제의 반인륜성을 알게 된 그들은 강제귀국 결정에 대한 불만을 안고 귀국하여 군 요직에 있으면서 김정일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모의는 조기 발각되어 1993년 2월부터 이들에 대한 숙청과 처형이 이어졌습니다.

김대 투서사건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 후반에 함흥초대소에서 김정일을 경호하는 호위사령부의 한 친위대 지휘관이 술에 만취돼 김정일을 권총으로 쏘려고 했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2호 초대소로 불린 함흥초대소는 함흥역에서 동해바닷가 방향으로 장흥역, 흥남역, 그 다음 서호역 부터는 바닷가를 따라 마전역, 신중역, 려호역까지 약30km, 7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안락한 노년생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북한 곳곳에 초대소들을 건설하였고 이곳에 무장한 호위사령부 부대들을 상주하도록 했습니다.

김정일의 동거녀이자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가 자주 가있던 초대소들로는 원산초대소, 함흥초대소(72호 초대소), 강동초대소(32호 초대소), 묘향산초대소, 단청초대소(신천초대소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 신천초대소, 영흥초대소, 창성초대소 등입니다.

함흥초대소에서 발생한 친위대 사살사건은 김정일이 직접 당중앙위원회 비서들에게 얘기해 그 전말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고영희가 이 사실을 당시 김정일의 일본음식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에게 말해주었고 그가 자기의 저서 ‘김정일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자세히 밝혀 세상에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날 김정일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람을 쏘이려고 바닷바람이 부는 초대소 정원으로 나왔습니다. 한창 김정일이 주변을 산책하다가 한 호위국 군관이 몰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초대소나 연회장에서 김정일이 고위간부들과 식사를 마치면 상에 남았던 음식들은 호위사령부 군관들과 친위대원들이 먹곤 했는데 이 친위대 군관도 이날은 ‘도둑술’을 초과해 마신 듯 했습니다.

김정일은 그에게 다가가 “뭐야, 지금 술 마시고 있나?”라고 물었습니다. 술기가 잔뜩 올라있던 친위대원은 갑자기 권총을 꺼내 김정일을 향해 겨누었습니다. 당시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그 권총이 김정일의 이마를 겨누었다고 말했습니다. 음주량이 초과되어 이미 실성한 상태여서 당장이라도 김정일의 머리를 총알로 맞구멍을 뚫을 기상이었습니다.

고영희는 친위대원의 뒤에서 그를 덮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술에 만취된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권총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쓰러졌고 고영희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친위대원이 그 자리에서 술에 취해 김정일에게 총을 겨눴던 그를 사살했습니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가 김정일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결국 그 호위사령부 친위대 군관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그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모두 정치범관리소에 보내졌습니다.

김정일도 그때의 일이 끔찍했던지 자주 그 일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김정일의 일본음식 전용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고영희에게 “그때 나는 ‘내 목숨이 여기까진가’ 하고 생각했어. 당신 덕분에 정말 살았어”라며 자주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자기의 저서에서 밝혔습니다.

북한당국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인 2012년에 85분짜리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를 군부대를 시작으로 관람하도록 했습니다.

이 1호 기록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몸 가까이에서 보필하였다며 고영희의 실물영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북한당국은 김정일이 즐겨 입던 국방색 잠바옷을 고영희가 처음 만들어 주었다며 강반석이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건할 때 첫 군복을 해입혔던 일과 너무도 닮은 모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는 김정일과 고영희가 봄철에 진달래가 핀 산언덕에 함께 있는 모습에 대해, 김정숙이 김일성의 신변호위를 위해 몸을 가로 막았다는 미술작품을 보여주면서 고영희의 투철한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영화에서 1980년대 후반에 함흥초대소에서 권총을 휘두르며 김정일을 겨냥했던 친위대원을 제압해 김정일의 목숨을 구했던 고영희의 ‘용감한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북한에서 신처럼 떠받들던 김정일도 한갓 호위국 군인의 권총 앞에서는 사시나무 떨 듯 했던 보통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가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고영희가 김정일과 함께 다녔다면서 보여주는 영상들에는 군부대 초소나 군인가족 공연장, 군인사택 등으로, 일반 주민들을 만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0대 중반에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로 김정일이 조직한 밤파티에 참가해 춤을 추던 기쁨조의 한 성원에 불과했던 고영희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동거하면서 김정은 형제들을 낳게 되었고 일생을 투명인간처럼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초대소들에서 숨어 살았던 고영희에 대해 김정은이 갑자기 후계자로 되었다고 해서 ‘조선의 어머니’로 둔갑시키려고 갑자기 기록영화를 제작하다보니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김일성이 급사하였고 김정일은 3년 상을 치르는 기간이라는 구실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정신상태가 멍해지기도 하였고 삶의 의욕마저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동유럽국가들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복귀하였고 김일성도 사망하고 며칠이 지난 1994년 7월 어느 날, 초췌한 모습으로 집무실에 앉아있던 김정일에게 찾아갔던 고영희는 깜짝 놀랄 일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멍한 정신으로 집무실 책상위에 놓인 권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김정일의 눈은 언제 그 권총으로 자기의 머리를 쏠지 모를 태세였습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고영희는 급히 접근해 권총을 치웠습니다.

친위대원의 권총사살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김정일은 자주 친위대 군관들이나 측근 간부들에게 “배신하면 이거야” 하면서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정일의 행동을 경험했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자기의 저서에 “측근들에게 조차 언제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발로”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당국이 강반석을 ‘조선의 어머니’, 김정숙을 ‘혁명의 어머니’, 고영희를 ‘선군의 어머니’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2004년에 유방암과 뇌경색 등 지병으로 사망한 고영희의 출생지와 경력은 여전히 비밀로 붙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