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씨 일가에 시집을 갔던 여인들의 수명이 길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주민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에게 시집을 가서 김일성과 김철주, 김영주, 세 아들을 낳았던 강반석의 수명은 40살이었고 1917년 12월 24일생인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1949년 9월22일 새벽 2시 40분에 만 32살, 세는 나이(한국나이)로 33살에 산후탈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네 번째 부인이자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2004년 5월 2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사망했습니다. 김정일보다 12살 어린 고영희의 당시 나이는 52살이었습니다. 결국 김씨 집안에 시집을 간 여자들의 수명이 짧다보니 항간에서는 김씨들이 ‘살(煞)이 세다’는 말이 돌기도 했죠.
오늘은 1953년에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부근의 쓰루하시(鶴橋)에서 태어나 11살에 부모들을 따라 북한으로 귀국하여 19살에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로 활동하다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김정은 형제들을 낳았던 고영희의 죽음에 대해 얘기해 드리려고 합니다.
김일성은 김정숙 사이에서 김정일과 김경희를 낳았고 김성애와 살면서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형제를 보았습니다. 김정일은 대학동창이었던 홍일천과 정식결혼이 아닌 연애를 하다가 맏딸 김혜경을 보게 되었고, 영화배우인 자기보다 5살 위인 성혜림과 살면서 맏아들 김정남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김정일이 몰래 동거했던 홍일천과 성혜림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가 데리고 있던 서기실 타자수였던 김영숙을 김정일의 정식 부인으로 결혼식을 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김영숙은 김정일의 정식 부인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살면서 김설송과 김춘송, 두 딸을 낳았지만 김정일이 밤 파티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였던 고영희를 보고 반한 이후로는 둘 사이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고영희는 자기보다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김정일이 여러 부인과 살면서 여러 자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요구하는 대로 원산초대소, 강동초대소 등 북한 곳곳에 있는 초대소들에 숨어살면서 김정은의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김일성도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정식 며느리로 인정한 김영숙만을 알고 있었기에 고영희와 김정은 형제의 존재를 알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1994년에 사망할 당시 김정은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재롱을 부리며 뛰노는 유아시절의 손자들을 무척 사랑하며 같이 놀아주고 자주 사진도 찍지만 김정일이 몰래 숨겨놓은 김정은 형제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김일성은 죽는 순간까지 김정은을 데리고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그래서 현재 김정은이 할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영희는 김정일과 살면서 김일성에게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평양에서는 본처 김영숙과 살면서 드물게 지방에 숨겨둔 고영희를 만나려고 초대소에 내려오곤 하던 김정일을 만나야 하는 자기의 처지가 봉건시기의 첩보다도 더 가련한 처지라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봉건시대의 첩은 본댁은 아니더라도 공식적으로 부인행세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고영희는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였으니 그가 받은 정신적은 고충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해되실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정신적인 고충이 심해지면 건강이 나빠집니다. 일명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정신적인 고충, 또는 심리적 타격은 뇌수에 작용하여 뇌하수체라고 하는 자극호르몬 생성조직의 기능을 마비시켜 신체의 신진대사가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암을 비롯한 각종 병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고영희는 정식부인이 아닌 김정일의 숨겨둔 동거녀 처지에서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세 자녀를 낳았지만 여전히 김일성에게 정식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한데다가 김정은 형제들도 손자, 손녀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정신적인 불안으로 이어졌습니다.
거기에 김정일이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과 동거하면서 본 김정남이 앞으로 후계자가 되면 김정일이 의붓동생이었던 김평일에게 한 것처럼 자기가 낳은 김정은 형제들을 숙청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영희는 김정일이 자기와 동거하면서도 다섯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당중앙위원회 서기실 김옥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면서 심리적인 불안감은 더 커졌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김정일이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조선중앙텔레비젼에 김정일의 현지지도 때마다 등장하곤 하던 미모의 여성이 기억나실 겁니다. 김정일의 비서로 알려졌던 김옥은 1964년생으로 고영희보다도 11살, 김정일보다 23살이나 어렸습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김정일이었기에 고영희는 언제면 자기도 다른 부인들처럼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인 불안과 심리적인 고충이 결국 1993년 유방암으로 터졌습니다. 고영희가 유방암으로 처음 진단받았을 때의 나이가 41살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고영희를 프랑스에 보내 암 치료를 받도록 했습니다.
당시 유방암 진단을 받은 고영희에게 병원에서는 암 조직이 생긴 한쪽 유방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으나 고영희는 절개보다 약물치료를 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고영희가 암 조직 절개수술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가 한쪽 유방이 없으면 김정일의 여자로서의 자기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암조직을 절개했다면 수명은 더 길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고영희는 자주 유방암 조직 상태를 진단받기 위해 프랑스와 스위스 등 서방의 병원들에 갔었고 꾸준히 항암치료를 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2년 12월, 고영희는 갑자기 뇌경색으로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고영희는 이날도 평소에 즐겨먹던 자장면을 먹다가 갑자기 오른쪽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이것을 다시 주우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의사를 불러 진료를 해보니 왼쪽 뇌수부위에 뇌경색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고영희는 프랑스에 가서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도 당시 뇌경색이 심하지 않았고 제때에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습니다. 그러나 뇌경색은 한번 오면 자주 재발되면서 이것이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간이 좋지 않아 약물치료도 건강을 해친다는 생각으로 항암 약물치료약을 쓰면서도 걱정하던 와중에 뇌경색까지 걸리자 고영희는 유방암보다 뇌경색치료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2003년에 유방암이 재발되면서 고영희는 프랑스에서 치료에 집중했습니다. 거기에 2003년 9월에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고영희의 병세는 더 심해졌습니다.
고영희는 자신이 병 치료를 위해 프랑스와 스위스 등 해외생활을 하는 동안에 김정일이 서기실의 젊은 여성인 김옥과 가까이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고 거기에 미국으로 망명한 여동생 고영숙 부부, 김정은의 배다른 형인 김정남의 존재 등 불안한 심리적인 고충거리는 병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끝내 고영희는 정신적인 불안과 몸속에 파고든 병마와의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채 2004년 5월에 만 51세, 세는 나이로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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