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필림영화와 신상옥 부부의 북한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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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해방 전 청진에서 태어나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신필림영화사를 설립하여 많은 영화를 촬영하여 유명하였던 신상옥 감독과 부인 최은희 배우가 김정일에 의해 납치되어 북한에 끌려갔던 얘기를 해드렸습니다. 오늘은 신상옥 감독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되어 김정일의 지시로 신필림영화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을 하였던 내용과 함께 북한주민들에게는 비밀로 부쳐져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탈출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해외출장으로 홍콩에 나왔던 최은희가 북한공작원들에게 납치되고 그를 찾아 반년동안 여러 나라들을 헤매며 다니던 신상옥 감독도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영화는 제작과정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개봉 후 관객 수가 많아야 수익이 발생하여 소요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체제수호나 국가지도자를 우상화하기 위한 선전성 영화들을 제작하다보니 정치성이 강한 반면에 생활의 진솔함은 부족하여 일반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성 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도 수상받기 힘들고 대외선전에서도 제한성이 있습니다.

김정일은 이러한 북한영화제작의 부족함을 한국에서 유명한 영화감독을 납치해서라도 해결하려고 신상옥 감독 부부를 납치하였습니다. 1978년에 납치된 두 부부는 북한에서도 5년 동안 따로 분리되어 생활하다보니 서로 만날 수 없습니다. 북한당국은 신상옥 감독 부부를 납치하여 데려왔지만 당장 영화제작을 하도록 하자니 실종된 그들을 찾는 한국의 영화예술인들은 물론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김정일의 지시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는 서로 납치되어 온 줄도 모르고 따로 격리되어 생활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감방에 수용되기도 하였고 투옥과정에 단식을 하여 정신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인기 있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집념이 강했던 김정일은 이들 부부를 절대로 죽이면 안된다고 지시하였습니다. 결국 납치 5년 만에 김정일의 지시로 신상옥 부부는 상봉을 하게 됩니다. 김정일은 인기영화를 제작하도록 그들을 강요하는 방법을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을 사는 방향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정일 생일연회에 참가하려면 고위층 간부 중에서도 특권층이여야 한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김정일의 생일파티에 김정일이 직접 초대해 참석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시 대동강구역에는 신필림영화촬영소 건물이 세워졌고 1983년부터는 본격적인 영화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납치해 온 신상옥 부부에 대해 북한주민들에게는 “남조선에서 영화제작할 수가 없어 공화국으로 의거입북한 영화인 부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신필림영화촬영소는 1983년 10월 18일에 설립되었는데 이날은 신상옥 감독의 생일 57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신필림영화촬영소를 설립하고 북한을 탈출한 1986년 3월까지 2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헤이그에서 일본의 식민지침략을 반대하여 활동한 이준 열사의 애국심을 그린 ‘돌아오지 않은 밀사’, ‘탈출기’, ‘소금’, 춘향전을 새로 각색한 영화인 ‘사랑 사랑 내사랑’,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 등 7개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직접 연출하였습니다.

‘길’, ‘철길을 따라 천만리’, ‘헤어져 언제까지’, ‘약속’, ‘붉은 날개’, ‘슬픔과 기쁨을 넘어’, ‘조선아 달려라’, 3부작으로 된 ‘임꺽정’, ‘홍길동’, ‘격침’ 등은 신상옥 감독이 직접 기획하고 연출과 카메라 촬영기법 등을 지도하면서 신필림 소속 감독들이 제작한 영화들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국제영화제들에 출품되어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기도 하였습니다.

신상옥 감독 부부는 국제영화제로 해외에 나가던 와중에 영국에서 진행된 런던영화제에 갔다가 한국의 남궁원 영화배우를 만나게 되어 그들이 북한에 납치되어 영화제작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는 탈출하기에는 북한 감시요원들 때문에 어려웠던 처지여서 남궁원 배우에게는 북한체제에 대한 좋은 말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춘향전을 각색한 영화 ‘사랑 사랑 내사랑’에서 키스하는 장면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영화에 등장하였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손이나 잡는 정도의 남녀 간의 이성적인 피부접촉(스킨십)이 새롭게 키스하는 장면으로 영화화면에 공개된 것은 당시 북한주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신필림 영화가 대 인기였고 1980년대 중반에는 신상옥 감독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가장 즐거운 대화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더 많은 영화를 제작할 것을 기대하였고 그 기대에 걸맞게 신필림영화는 터진 물꼬처럼 줄줄이 개봉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영화제작에 앞서 그들에게 주체사상 학습과 혁명전통교양 등 다양한 형식의 사상교육을 강요했고 도청과 감시를 항시적으로 하여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장악하였습니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북한당국의 대우가 만족하였지만 언제 어떤 일로 감옥에 수감될 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1986년 1월부터 그들은 북한을 탈출하려고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웽그리아(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영화제작으로 출장갔을 때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같은 청진태생의 김인환에게 전화를 해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2월에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려고 도이칠란드(독일)에서 왔다가 영화촬영기자재들을 구입한다는 구실을 대고 오지리(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왔다가 3월 13일에 현지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뛰어들어 탈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1986년 3월 13일 아침에 북한 경호요원들에게 “오늘은 일본에서 온 모 영화제작사 대표들과 합작영화제작을 위해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가서 오찬을 하면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따라오라”고 하였고 낮 12시 경에 택시를 불렀습니다. 이들 부부는 이미 잘 아는 사이인 일본 교도통신 특파원과 짜고 두 대의 택시를 불러 첫 택시에는 일본인 기자와 신상옥 감독 부부가 타고 다른 택시는 감시요원들이 타고 따라 오도록 했습니다.

뒤차를 따돌리고 미국대사관에 도착한 신상옥 부부는 북한당국에 의해 전 세계에 그들이 자진 월북했다고 알려진 것은 거짓말이며 납북당한 사실을 실토하였고 미국 망명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신상옥 부부가 탈출한 이후에 북한에서는 그들이 400여 만달러의 돈을 들고 튀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제작에 필요한 기구들과 도구들을 구입하려고 북한당국이 준 돈은 230만 달러였습니다. 탈출 후 그들은 은행계좌에 있는 그 돈을 고스란히 북한당국에 국제은행을 통해 돌려주었습니다.

신상옥 감독부부가 탈출하고 5달 후인 1986년 8월에 김정일의 지시로 신필림영화촬영소는 해산되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의 서기였던 김재일은 출당되어 탄부가 되었고 신필림 기획실장 안익수, 신필림영화들에 출연했던 인민배우 최창수와 김정화, 장선희 등은 사상투쟁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