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첫 시집-관서시인집(關西詩人集)

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은 세상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감독과 통제가 가장 극심한 나라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영화나 연극은 물론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젼 그리고 모든 출판사들을 감독통제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짓는 작사나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 시인 등 문학인들이 창작한 모든 작품들은 선전선동부의 검열에서 통과되어야만 하는 것이 북한입니다.

이러한 문화예술과 언론에 대한 노동당의 감독통제는 해방되어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관서시인집」의 출간배경과 그 내용을 통해 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가장 최초의 시인집인 관서시인집은 당시 평양에 있던 인민문화사에서 1946년 1월에 출간한 시집입니다. 여기서 관서지방이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일대를 말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환희와 감격으로 설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글마저 빼앗겨 일본말과 글을 사용하도록 강요당했던 문학인들의 기쁨은 더 강렬했습니다. 일제강점 말기에는 일본어로 쓴 문학작품만 발표나 출간이 가능했던 문학인들에게 모국어인 조선말(한글)의 회복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습니다.

황순원, 김조규, 박남수, 정복규, 양명문, 정희준, 심삼문, 한덕선, 최창섭, 신진순, 안용만, 김현주, 김우철, 이원우 등 열네 명의 시인들이 공동으로 펴낸 이 시집의 표지만 봐도 그 당시의 문학인들의 심중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시집 표지에는 책 제목인 「관서시인집」과 함께 부제목인 「해방기념특집(解放紀念特輯)」이라는 글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표지에는 말에 올라탄 남자와 깃발을 든 여자가 기뻐서 춤을 추는 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천리마동상은, 여기에서 영감을 받은 김일성이 후에 상상해서 만수대언덕에 세웠다고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평양시가 지금처럼 특별시가 아니고 평안남도 도소재지로 되어 있었던 관계로 이 시집의 판매권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임이 밝혀진 것은 노동당의 선전선동부의 감독통제가 당시에는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겠습니다. 이 시집의 저술 책임자는 일제강점기에 ‘동행회’라는 조직을 이끌었고 무궁(無窮)이라는 이름의 기관지를 발행하여 문학을 통해 농민들의 민족의식과 조선독립 의지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던 유용한(柳龍翰) 선생이었습니다.

시집에는 김조규가 6편, 황순원과 양명문이 5편, 박남수와 정복규와 이원우가 3편, 정희준과 심삼문이 2편 그리고 나머지 시인들은 각각 1편씩 실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인들에 대해 살펴본다면 시집의 목차에서 가장 첫 번째 시인 「부르는 이 없어도」를 창작한 황순원(黃順元)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 출신입니다. 시 구절들을 보면 해방의 환희는 격조높이 노래하고 있으나 김일성과 항일투쟁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북한당국이 해방 후 김일성에 대해 주민들이 흠모했다는 내용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집에서 가장 많은, 6편의 시를 실은 김조규(金朝奎)는 1914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시인입니다. 20대 중반부터 시를 창작하여 유명했던 그는 해방 전에는 「재만조선시인집」을 편집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 평양예술문화협회에 가입하여 북한에서 최초로 개인시집 「동방」을 발간하였습니다.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박남수(朴南秀)는 대학 시절에 일본에서 시집 「초롱불」을 냈던 인물입니다. 해방을 전후로 하여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식산은행 평양지점장을 지내다가 6.25남침전쟁시기에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1913년 평양의 부자집에서 태어난 양명문(楊明文)은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와 일본 동경 센슈대학 법학부를 다닌 유학생 출신 시인입니다. 그는 1940년에 첫 일본어 시집 「화수원」을 발간하는 것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43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해방 후 평남건국준비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명태의 처지에 빗대어 노래한 시 「명태」로 인해 내무서에 불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의 첫 시집인 관서시인집 출간에 참여한 황순원, 김조규, 양명문 등 시인들은 1945년 9월 북한의 첫 문화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의 성원들이었습니다. 평양예술문화협회는 구소련의 공산당 이념이나 김일성이 주장하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운동보다는 민족주의 우파였던 조만식 선생의 노선을 더 공감하였습니다.

1946년에 평양예술문화협회가 해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최명익입니다. 그는 평남도 증산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1921년에 일본에서 유학를 마치고 귀국해 해방 후 평양예술문화협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6년 북한의 모든 권력이 북한주둔 소련의 군정과 소련공산당에 넘어가자 최명익은 친소, 친공분자로 전향한 후 좌익성향의 문예단체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과 연합하여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 중앙상임위원과 평안남도 위원장직을 맡았습니다.

관서시인집은 북한에서 출간된 첫 시집이라는 것으로 하여 의미가 크지만 북한을 강점한 소련군정과 소련군 대위 출신의 김일성의 문학예술에 대한 탄압의 대상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35편의 작품들은 발간되고 나서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정치적 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후 주민들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김일성과 소련군에 대한 그 어떤 언급이나 찬양이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부르는 이 없어도」(황순원), 「예전부터」(정복규), 「독립송」(양명문), 「삶의 기쁨」(한덕선), 「조선어」(이원우) 등 모든 작품들은 해방을 기념하여 발간된 시일 뿐 지금의 북한의 소설이나 시집처럼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내용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집에는 해방 전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시들도 실렸습니다. 김조규의 시 「모멸속에 걸어온 어느 시인의 유고초(遺稿抄)」는 퇴폐적인 작품이라고 비판을 받았고, 정희준의 시 「소련군(蘇聯軍)」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관서시인집에 대한 비판과 함께 평남지구에 설립된 좌익문예단체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의해 평양예술문화협회는 해체되었고 1946년 3월 25일에는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결국 관서시인집 비판은 민족주의 우파성향의 평양예술문화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소련강점군과 김일성이 북조선예술총동맹 창설을 위해 꾸민, 문학예술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이고 공격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북한당국이 당시의 평양예술문화협회 해체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는 이유는 저들의 반민주적이고 반동적인 행위가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문학, 김씨 일가의 우상화선전에 이용되는 정치문학의 지옥인 북한이야 말로 사람들의 감성을 통제하는 반인륜적인 동토대라 할 수 있습니다.

관서시인집 발간에 참여한 시인들은 6.25남침전쟁시기에 월남한 분들도 있고 북한에 남아 북한당국의 어용나팔수로 활약을 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분들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이 북한당국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학예술탄압의 희생물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