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향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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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관서시인집」은 해방 후 평안남북도 지방의 시인, 작가들이 출간한 시집이라면 시집 「응향(凝香)」은 원산지역의 창작가들에 의해 출간된 시집입니다. 1946년 1월에 「관서시인집」이 출간되고 11개월이 지난 1946년 12월에 시집 「응향」이 출간되었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당국의 혹독한 검열을 받게 됩니다.

시집 「응향」에 대한 검열에 대해 「응향사건」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때부터 북한에서 언론과 출판, 창작활동의 자유가 무참히 짓밟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응향사건」의 발단과 사건 전말에 대해 얘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은 1941년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 있는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소련공산당 당보인 ‘프라우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작가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푸쉬킨의 시들을 읽으면서 정치에서 문학예술의 선동적인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처음부터 문학예술창작에 대한 감독통제를 강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김일성의 소련군88여단 출신들인 빨치산파에 대항할 수 있는 중국연안파, 소련공산당파, 국내파 등 다양한 정치세력의 견제 때문이었습니다. 1946년 3월에 평양예술문화협회가 해산되어 좌익성향의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과 연합한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이 결성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평양지역의 작가들만 망라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10월에 기구를 확장하여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무용, 사진 등 7개의 산하동맹을 두었고 전국조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학예술단체들을 내세워 그 다음 달인 11월에 있게 될 선거를 위한 선전활동도 활발히 벌렸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해방군의 탈을 쓰고 북한을 강점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소련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북한의 정책이 좌지우지 되는 시기였지만 지나친 내정간섭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불만이 두려웠기에 소련군정이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관서시인집이 출간되었을 당시까지는 강력한 검열을 강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1946년 11월에 치러진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북조선노동당이 승리하자 주민들에 대한 사상개조에 전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거 이후 1946년 12월 2일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의 결정서 ‘사상의식개변을 위한 투쟁전개에 관하여’의 내용만 봐도 김일성의 문학예술에 대한 통제의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12월에 원산에서 시집 「응향」이 간행되자 김일성은 최명익, 김사량, 송영, 김이석 등을 검열원자격으로 원산작가동맹에 내려 보냈습니다. 1947년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동안 진행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제1차 확대상임위원회에서는 시집 「응향」의 문제점을 파헤치기 위한 검열조 파견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검열성원들의 구성원들 중 최명익은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작가동맹인 평양예술문화협회를 해산하고 친소성향의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야합시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설립하도록 하는데 한몫을 담당했던 친소, 친공분자입니다.

평양출신인 김사량(金史良)은 일본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중국 팔로군 조선의용군 기자로 활동하였던 인물입니다. 광복되고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 북한으로 돌아와 새로 설립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집행위원 겸 국제문화국장을 하면서 검열성원에 망라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출신인 송영(宋影-본명은 송무현)은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작가동맹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참여하였던 극작가입니다. 광복 이후 그는 월북하여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소속의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6.25남침전쟁이 끝나고 그는 1950년대 후반에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원작을 창작했던 인물입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제1차 확대상임위원회가 있은 후 5일이 지난 1월 23일에 문학평론가인 안함광은 문학예술평론에서 시집 「응향」에 대해 ‘인민의 사상을 좀먹는 이러한 경향을 철저히 부셔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에서는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 대해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경향의 시라고 비판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시인들의 작품창작이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규제를 받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응향사건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기관지인 '문학' 제3호에 실리면서 1947년 2월에는 남한에 있는 문학예술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문학예술에 대한 자유를 억제하고 작가들의 문학활동을 감독통제하려는 김일성과 북한당국의 행위에 대해 당시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초대회장이었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문학과 자유의 옹호」라는 제목으로 응향사건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조연현 선생과 수필가인 문학평로가 곽종원 선생, 언론인이며 평론가인 임긍재 선생들도 북한당국이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가로막는 처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응향사건을 해방 후 북한에서 일어난 첫 문학예술탄압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비극적 정치사건 중 공식적으로 표면화시킨 최초의 사건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대해 북한당국이 진보적 민주주의로 가장한 공산주의 독재와 야만적인 인민탄압, 악랄한 수단을 그대로 탄로시킨 사건이라고 질타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모든 예술 활동이 노동당에 귀속되었고 항시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가들이 소설이나 시, 노래가사를 잘못 창작했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갔습니다.

응향사건은 북한정권 수립일인 1948년 9월 9일을 기해 정치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시집 응향에 실린 시들은 착취 계급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들이라며 건국시기인 현 단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동행위였다고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응향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문학예술계에서는 북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을 칭송하거나 건국관련 내용이 들어있지 않으면 부르주아 문학으로 치부당해야 했습니다. 응향의 시들에 대해 사회의 본질적인 측면이 배제된 개인성향의 시라느니, 북조선민주건설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적 개인주의가 표현된 저속한 시라고 비판했습니다.

응향사건 이후로 북한 문단에서는 ‘응향 같은 작품’이라는 표현이 생겨났고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사상성이 없는 작품, 계급성이 결여된 문학, 예술지상주의, 반인민적인 순수문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 이후에 창작되는 시들은 북조선노동당 정책을 옹호하거나 김일성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일관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응향에 자기의 시를 실었던 시인이며 극작가인 구상(본명 구상준)은 응향사건을 통해 반동적인 작가라는 누명을 쓰게 되자 원산에서 한국으로 월남하였습니다. 시집 응향 표지 삽화를 그렸던 화가 이중섭도 작가 구상과 함께 비판받고 더 이상 북한의 공산독재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월남하였습니다.

응향사건 이후 7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조선시대 이조봉건사회 같은 세습독재정치가 북한에서는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응향사건 이후 ‘문학예술을 사상투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라며 작품창작의 자유를 묵살하고 김씨 우상화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북한정권이야 말로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반인민적인 정권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