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1999년 1월부터 9월까지 양강도를 휩쓴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양강도에서 강행되었던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과정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드리려 합니다. 1999년 1월 선발대를 시작으로 4월 초 보위사령부 검열대 6백여 명이 양강도 지구사령부(당시 9군단)에 들이닥쳤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은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이 지나서 시작되었습니다. 5층짜리 혜명여관과 양강도 지구사령부, 성후동에 있는 8층짜리 답사숙영소 건물과 시 안전부(경찰) 구류장들은 구속된 간부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때로부터 검열총화가 있고 검열성원들이 철수를 하던 9월 말까지 양강도 간부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처형은 계속 되었습니다. 8월 말에 있는 총화보고에서 보위사령부는 구속된 상태로 조사를 받은 대상이 4천 몇 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하나의 사실만 놓고도 당시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보위사령부는 나라가 경제가 파탄 나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진 것이 김정일의 정책을 왜곡 집행한 일부 간부들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는 황해도와 남포시에 대한 검열총화에서 하던 말을 꼭 같이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부패타락한 간부들을 철저히 신고할 것을 검열총화에서 거듭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보위사령부에 대한 양강도 인민들의 저주는 김정일을 향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양강도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에 대한 양강도 인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 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양강도를 검열했던 보위사령부의 많은 간부들이 처벌받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김정일이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에 강력한 제동을 건 이유는 인민들에게 총대를 들이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도 보위사령부의 만행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되어 크게 분노한 듯이 김정일은 교묘하게 사태를 연출했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김정일이 문제로 삼은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공개처형은 당시 북한 사회안전성(경찰)의 처형방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보위사령부는 한 사람에게 9발의 자동보총(소총)탄을 퍼부었습니다. 보통 사회안전성은 주민들을 처형할 때 몸에서 피가 튀지 않도록 인민군의 낡은 솜동복을 입혔습니다. 가슴과 다리, 등에 각각 세발씩 모두 9발을 쏘는 방식으로 처형한 다음 신속하게 시신을 처리해 주민들에게 주는 공포감을 최소화 했습니다.
하지만 보위사령부는 간부들과 주민들을 처형할 때 일부러 피가 쏟아져 나오도록 방치했습니다. 그것도 9발의 총탄을 모두 얼굴에 쏘아 사람의 머리가 완전히 날아나는 방식으로 주민들의 공포감을 극대화 시키는 잔인한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보위사령부는 처형자들의 머리에 총탄을 쏘는 방식과 관련해 “사상이 변질된 자들은 머리통을 박살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공개처형에 나이 제한을 두지 않아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특히 보위사령부는 한두 명이 아닌 집단 처형방식을 많이 이용했는데 사형장에 모인 주민들을 무장한 군인들이 둘러싸도록 한 다음 사형장 반대편 주민들이 모여선 뒤에 기관총을 걸어 놓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대기시켜 공포감을 더했습니다. 훗날 김정일은 인민들의 등 뒤에 총구를 들이대고 기관총까지 걸어 놓았다는 구실로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김정일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하나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양강도의 어린이들 속에서 크게 유행했던 놀이가 보위사령부의 공개처형을 본뜬 놀이였습니다. 장난감도 없고 무언가 새로움을 추구하던 양강도 어린이들 속에서 보위사령부의 집단처형 방식은 짜릿함을 선사하는 좋은 놀이가 됐습니다. 유치원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던 시절이라 어린이들은 여름철 해가 뜨면 시도 때도 없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서 검열대 몇 명을 선출하고 뿔뿔이 흩어지면 막대기를 총처럼 든 어린이들이 흩어진 어린이들을 찾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숨지 못하거나 검열성원으로 지목된 어린이들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이들은 붙잡아 동사무소 마당이나 아파트 공지의 구석진 쪽에 금을 그은 공간, 소위 ‘감옥’이라는 곳에 일정한 인원이 찰 때까지 가두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적게는 7명, 많게는 10명 정도씩 잡아들이면 그때부터 공개처형이 시작됩니다. 숨었던 어린이들이 모두 모여선 가운데서 누군가 대장 행세를 하는 어린이가 나서 명령을 주면 검열성원 행세를 하는 아이들이 처형 대상들의 손을 뒤로 묶었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뒤로 묶인 처형 대상들을 마당 한가운데로 끌어내 일렬로 세워놓았습니다. 검열성원으로 선발된 아이들이 나무 막대기를 총처럼 들고 대장행세를 하는 아이로부터 처형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대장의 처형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 검열성원 흉내를 내던 아이들이 손에 든 막대기를 총처럼 겨누고 처형 대상들을 향해 입으로 ‘탕, 탕’ 총을 쏘는 소리를 재현했습니다. 손을 뒤로 묶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따라 땅에 푹푹 고꾸라지면 놀이는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검열로 양강도에서 유행된 어린이들의 총살놀이가 북한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자 김정일 정권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법당국이 동원돼 인민반마다 회의를 열고 어린이들의 사형놀이를 단속할 것을 주민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검열 대상이 중간급 간부들이라고 했지만 경우에 따라 인민반 주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검거돼 양강도 주민들은 당시의 보위사령부 검열을 ‘제2의 민생단 사건’이라고 불렀습니다. ‘민생단 사건’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투쟁을 할 때 현지 공산당 내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숙청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가 맨 처음으로 공개처형한 사람들도 간부들이 아닌 일반 주민들이었고 엄연하게 따지면 사회안전성이 맡아야 할 사법대상자들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첫 공개처형은 1999년 4월 2일 혜산시 연봉동에 있는 호프 밭에서 시작됐습니다. 양강도는 김일성이 생전인 1990년 1월 8일 아편재배를 직접 지시한 지역입니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외화벌이를 위해 양강도에 있는 거의 모든 국영 및 협동농장들에서 ‘백도라지’라는 이름으로 아편을 재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에 ‘고난의 행군’이 겹치면서 의약품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주민들은 아편을 ‘만능 치료제’라고 부르며 광범하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양강도엔 수많은 아편중독자들이 생겨났고 중국을 통한 아편밀수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1999년 4월 2일 혜산시 연봉동의 호프 밭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주로 양강도의 시, 군들에서 아편중독자로 체포돼 사회안전성 구류장에 이미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죄가 무거운 6명이 선정돼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 달 뒤인 5월 8일, 혜산시 위연지구 변전소 주변에서 처형된 4명은 아편을 팔아먹은 춘동진료소 의사와 그로부터 아편을 사들인 3명의 주민들이었습니다. 그 해 6월 중순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에서 처형을 앞둔 4의 아편중독자 중 육해운성 책임비서의 처남이 조건 없이 풀려나 주민들의 큰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청취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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