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정은시대 공포정치의 서막-리영호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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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정일이 2008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후 그때서야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 그가 김정일의 4번째 부인이었던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사생아였다는 것은 이젠 비밀이 아닙니다. 후계세습 준비기간이 길었던 김정일과는 달리 20대 어린 나이에 갑자기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은 2011년 김정일이 급사하자 무자비한 숙청을 시작으로 독재자의 기질을 드러냈습니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에서는 권력승계가 빠르게 진행되어 김정일 장례식을 마치고 보름도 되지 않은 2011년 12월 30일에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김정은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하였고 2012년 4월에는 김정은 정권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이렇듯 발 빠르게 김정은 중심의 권력체계를 공식화, 제도화하면서 노동당 중심의 정상적 통치체계를 확립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을 김정일과 비교해보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권력승계의 속도와 압축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3살 되던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배치되어 당사업을 시작한 김정일은 1974년에는 당 정치국 위원 겸 조직지도부장직을 맡으면서 내부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으니 김일성이 죽은 1994년까지 20여 년이나 후계자 수업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 다음해인 2009년에야 비로소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 2년이라는 짧은 후계자 수업기간만 거치다보니 김정일에 비해 가까운 측근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숙청과 처형을 강행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의 권력승계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김정일은 20년간의 후계자 수업과정에서 당, 정권, 군부를 확실하게 장악했기에 공식 직함이 없더라도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죽고 고난의 행군시기를 유훈통치기간으로 두고 고난의 행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는 강성대국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김정일 시대의 출범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당시 짧은 후계자 수업으로 리더십이 미약했기에 4개월 만에 체제불안을 막기 위한 차선책으로 떠밀리듯이 추대되는 방식으로 권력을 승계하였습니다.

북한의 권력세습 계승과정은 ‘계승의 정당화’와 ‘계승의 제도화’가 필요하게 됩니다. 계승의 정당화는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새 지도자의 정치사상적 정통성뿐만 아니라 새 지도자의 정책적 업적이 필요합니다. 계승의 제도화는 후계자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새로운 간부들이 북한의 최고위직에 배치되어 새로운 권력기반을 제도적으로 구축할 것을 요구합니다. 비록 후계자 수업기간이 짧았지만 김정은도 권력을 물려받은 후에 북한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로 한 단계 높이도록 했고 계승의 정당화를 위해 선대 수령들의 권위에 의존하였습니다.

집권 초기에 북한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김일성의 모습과 옷차림, 걸음걸이 등을 따라하면서 인민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려고 꾀한 것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기억하고 계실 것이라고 봅니다. 김정은은 새로운 협동농장관리체계인 포전담당제와 분조관리제 등을 포함하는 ‘6.28 방침’을 시범 운영하면서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전심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고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통해 부족한 자신의 업적을 쌓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고위특권층 간부들이었습니다. 김씨왕조 시대의 현대판 봉건중앙관료로 종사하는 고위특권층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도 공포정치의 시범사례로 처형되곤 하였습니다. 김일성 시대에는 종파숙청이라는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인물들이 처형되었고 김정일 시대에는 고난의 행군시기 굶어죽는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려고 중앙당 농업비서인 서관희를 처형하였으며 김정은이 후계자로 된 후에는 화폐개혁의 실패를 전가해 중앙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처형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권력세습과정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과거시대 선대 수령의 충신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특권고위층들입니다. 김정일은 1970년대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3대혁명소조를 신설하여 이를 기반으로 자기의 권력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 수업기간이 짧았던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김정일이 사망하고 권력을 승계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측근세력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김정일이 죽고 그의 시신 영구차를 호위한 김정은과 7명의 측근들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정은과 국방위원회 장성택 부위원장, 중앙당 선전선동부 김기남 비서, 최고인민회의 최태복 상임의장, 인민군 총참모장 이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각, 국가안전보위부 우동측 제1부부장이 영구차 호위 8인방이었습니다.

당, 내각, 군부 우두머리들을 거느리고 김정일 영구차 호위를 하였던 김정은의 비장해보였던 얼굴에는 앞으로 있게 될 피의 공포정치가 구상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절정에 있는 대상들을 무자비하게 쳐서 숙청의 공포바람을 불어오려는 것이었죠.

북한의 정치체제는 일당독재인 노동당과 내각, 군부 위에 수령이 군림하는 수령제 체제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노동당과 근로단체 조직, 검찰, 보안성, 국가안전보위성, 인민군 등 모든 국가기구들이 최고권력자인 김정은의 활용기구이며 최고 결정권은 오직 최고영도자인 김정은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급사하자 짧은 후계자 수업을 걸친 김정은이 정권을 승계했지만 북한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김정은이 감당하기에는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를 위해서는 숙청을 통해 공포를 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 김정은과 그를 추대한 세력들의 정치적인 타산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정일의 시신영구차 호위 8인방이 차를 둘러싸고 섰던 위치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오른쪽 가장 앞자리에는 김정은이 서고 그 뒤에는 장성택이 섰고, 왼쪽 가장 앞자리에는 리영호 총참모장이 섰습니다.

당시 김정은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위치에 장성택과 리영호가 있다는 것은 영구차 호위 위치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두 명은 김정은 권력승계를 위한 제물이 되었죠. 1942년 10월 5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리영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한 2009년부터였습니다. 리영호 총참모장은 2010년 9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영남, 조명록, 최영림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면서 인민군을 대표하여 김정은 체제를 보좌하는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김정은의 신임으로 인민군 차수로, 총참모장으로 부상한 리영호의 숙청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리영호 총참모장이 “김정은의 허가 없이 열병식에 참가한 군부대를 마음대로 움직였다”는 숙청설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대내에 한함’이라는 기호문서로 다루어진 내부자료에 따르면 “어느 한 부대일꾼들은 반당반혁명분자 리영호놈의 직권에 눌리어 그놈이 내리먹이는 요구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의 사상과 의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유부단하고 맹종맹동하게 처신해 인민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 하였다”, “인민군대는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발밑에서 폭탄이 터져도 최고사령관이 결론하기 전에는 자기 위치를 이탈할 권리가 없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리영호 숙청으로 시작된 김정은의 숙청정치, 공포정치는 고모부 장성택,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내각부총리 최영건, 인민군 작전국장 변인선, 당 재정경리부장 한광상 등 무려 4년 동안에 70여 명의 고위간부 숙청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