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태권도

북한 태권도 시범경기 모습.
북한 태권도 시범경기 모습.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사회의 모든 분야를 노동당이 장악, 통제하는 북한에서 체육도 정치의 이용물, 지도자의 영도력에 대한 선전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대중화된 태권도의 발전역사와 숨겨진 진실에 대해 얘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북한당국은 태권도를 우리민족의 전통체육종목이라고 선전하면서 대중화에 열을 올리며 체제선전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는 삼국시기 이전, 한반도에 고대 부족국가들이 존재하던 시기부터 투기형태의 무예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부족국가들이 흡수·통합되면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전통무술인 ‘택견’이 생겨났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화랑도를 설립해 삼국통일을 위한 무예를 수련하도록 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도 말타기와 활쏘기, 맨손격투 무예를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분벽화와 옛날 문헌들에 남아있어 역사학자들에 의해 그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고려시대에 택견은 ‘수박희(手搏戱)’로 불렸습니다. 옛 고서들에는 고려의 28대 왕인 충혜왕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거나, ‘임금이 화비궁에서 수박희를 보셨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만 봐도 수박희는 무예이면서도 스포츠 성격을 띤 체육경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태종실록’에는 ‘병조의 의홍부에서 수박희로 인재를 시험해 방패군에 보하되 세 사람(3인)을 이긴 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세기 말 이조 22대 왕인 정조 때 간행된 서적인 「무예도보통지-권법편」에는 수박희가 실전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는 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고 일반 백성들도 수박희를 놀이처럼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권도는 이렇게 수백 년 동안 택견과 수박희 등으로 불리며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가라테와 통합하려는 위기에 처한 환경에서도 민간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어왔고 해방 후 한국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방 후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활동한 사람들이 귀국해 당수도와 공수도란 무도명으로 도장들을 창설하고 제 나름대로 조직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서울에는 이원국에 의해 설립된 청도관과 전상섭의 조선연무관 공수도부의 지도관, 윤병인이 세운 창무관, 황기의 운수부무우회, 당수도부의 무덕관이 대표적입니다.

1946년 7월에 태권도 모체관 대표들의 통합과정에 성사와 무산이 반복되면서 전후에 대한공수도협회, 대한당수도협회 등 태권도조직이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 한반도에 생겨난 태권도 무도명은 모두 일본에서 배워온 당수도, 공수도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지만 일본 유학중 쇼도깡(송도관:松濤館)에서 가라테를 배운 최홍희 총재는 군 장령(장성) 시절인 1955년에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권도란 무도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군을 시찰하면서 당수도 시범 연무를 보다가 ‘택견이구만’라는 말을 한 것이 최홍희 총재에게는 음운에 대한 착상을 불러일으켜 한자로 밟을 태(跆)자와 주먹 권(拳)자를 붙인 태권도가 탄생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청도관과 오도관을 주축으로 활동하였던 최홍희 총재는 자신이 직접 작명한 태권도(跆拳道)를 정식 명칭으로 하여 1959년 9월 3일에 대한태권도협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태권도 조직의 명칭은 대한태수도협회로 바뀌었다가 1965년 8월 5일에 대한체육회 제15차 이사회 결의에서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수박도회를 통합하여 대한태권도협회로 명칭이 재결정되었습니다.

함경북도 길주군이 고향인 최홍희 총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본 도쿄에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중앙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6살 나이인 1944년에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련대장, 사단장, 군단장 등 한국군 장령으로 군복무를 하였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말레이시아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최홍희 총재는 군 장령시절인 1959년에 국군태권도시범단이라는 이름으로 19명의 사범들을 이끌고 윁남과 대만 등을 방문하여 태권도를 알렸고 말레이시아 대사를 마친 1965년에는 국기태권도친선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4명의 사범을 데리고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들에 순회시범을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순회시범을 다녀온 나라들을 중심으로 최홍희 총재는 태권도 세계화를 목적으로 1966년 3월 22일 서울에 있는 조선호텔에서 한국, 서독, 미국, 토이기(터키), 윁남(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아랍연방공화국, 이탈리아(이태리) 등 9개 나라에서 온 태권도 대표들로 국제적인 기구인 국제태권도연맹을 발족하였습니다. 이 국제태권도연맹은 기존의 대한태권도협회와는 별도의 다른 태권도조직으로서 점차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사이에 해외사범 파견, 단증 발급, 품새 통합 등 여러 문제들에서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고 한국 내에서 최홍희 총재의 국제태권도연맹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습니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던 최 총재는 국제태권도연맹이 위축되는 것이 정권의 정치적인 압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이 대한태권도협회에 태권도 주도권을 빼앗긴 결정적인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청와대 경호실 김운용 보좌관이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등용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최홍희 총재에 의해 생겨난 태권도라는 명칭은 정착되었으나 김운용에게 밀려난 최 총재는 1972년에 한국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홍희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북한출신 장성들에 대한 배척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망명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태권도 주도권에서 밀려난 분풀이가 망명이유였던 것입니다.

최홍희 총재는 한국을 떠났지만 대한태권도협회의 활동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한국을 중심으로 태권도 세계화는 빠르게 지구촌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김운용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부임되면서 정부의 지원으로 국기 태권도 지정, 국기원 건립, 세계태권도연맹 창립, 미국체육회와 국제경기연맹, 국제군인체육회 등에 태권도 경기종목 가입, 해외태권도 보급, 1980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세계태권도연맹의 태권도 정식 승인, 1986년 서울아시아체육경기대회(아시아게임) 공식종목 채택, 88서울올림픽대회와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대회에서 시범종목 채택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1973년 5월 28일에 한국에서 태권도 국제기구인 세계태권도연맹이 조직되면서 최 홍희 총재가 설립한 국제태권도연맹은 보잘것없는 태권도조직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최홍희 총재는 해외에 있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국제태권도연맹의 근거지를 캐나다 토론토로 옮겼고 1973년부터 국제태권도시범단을 이끌고 국제태권도연맹의 태권도 해외보급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세계태권도연맹은 한국이 주도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은 최홍희 총재가 북한에 보급하면서 북한으로 근거지를 옮겨 현재는 북한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은 190여개 나라가 가입한 태권도 국제기구로서 규모가 가장 큽니다.

북한당국은 당시 해외에 망명하면서 국제태권도연맹 세계화에 관심을 가졌던 최홍희 총재에게 환심을 가지도록 하여 1980년대부터 북한에서 태권도를 보급하였지만 결국 태권도 역사는 한국이 북한보다 30년 앞선 셈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최홍희 총재가 국제태권도연맹 근거지를 북한으로 옮긴 과정과 현재 북한당국이 태권도의 대중화를 통해 체제유지와 국가 홍보에 태권도를 이용하는 내용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