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공포정치로 정권의 새 출발을 알린 김정은은 김정일 시신을 운구한 8인방 중 리영호 인민군총참모장과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에 이어 고위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하고 그 다음해인 2012년 7월에 리영호 총참모장을, 2013년 12월에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김정은은 2014년 연초부터 유일적 영도체제를 세우기 위해 고위간부들을 마구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시대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김정일 시대에는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3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김씨왕조의 독재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죠.
2014년 2월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개최된 당 사상일군대회에서 전사회적으로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제를 확립할 데 대한 사상전이 강조되었고 대회 이후에는 당원들과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전당·전군·전민을 대상으로 하는 김씨 일가의 ‘백두혈통’, ‘유일적 영도’, ‘수령결사옹위’ 관철을 위한 사상교양사업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장성택 처형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세해 당내 종파잔재청산 작업이 고조되었습니다. 문경덕 평양시 당 책임비서, 리영수 당 근로단체 비서, 리태남 내각부총리 등 고위간부들이 숙청되었고 인민군 군부대 고위군관들에 대한 소위 견장정치로 ‘제노(내로라)’라고 하던 군부 장령들의 불안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과 고모 김경희의 숙청 이후에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의 4번째 부인인 재포출신 무용수 고영희 사이에서 출생했고 원산초대소 등 김정일의 별장에서 숨겨진 채 성장한 김여정은 오빠인 김정은이 후계 권력자로 등장하면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셈입니다.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김정은의 서기실 고위간부들의 모략과 계책으로 김정은의 측근들은 최룡해와 황병서를 중심으로 교체되었고 여기에 김여정까지 가세해 소위 친정정치체제가 수립되어갔습니다.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보위부의 숙청정치 모략으로 김정은은 무자비한 숙청의 비수를 꺼내들었습니다. 북한에선 ‘조국해방’과 ‘당 창건 70주년’을 맞으며 2015년 2월 10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숙청정치를 암시하는 공포정치의 정당성이 주장되기도 했습니다.
김정은은 정치국 회의 이후에 2월 18일에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당의 유일적 영도에 도전한 현대판 종파분자들이 적발, 분쇄되었고 앞으로도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행위와의 투쟁을 강도높이 벌여나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김정은의 숙청정치, 공포정치가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 정치국 확대회의에는 노동당 정치국 위원, 후보위원들뿐만 아니라 내각 부총리, 당 중앙위원회 부장, 제1부부장, 해당부서 과장, 도당 책임비서들과 위원회·성·중앙기관·근로단체·무력기관의 책임일군들이 참가했습니다.
2015년은 북한에서 피바다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국 회의와 확대회의 이후에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공개처형 되었고 뒤이어 60여 명의 고위간부들이 줄줄이 숙청되었죠.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의 처형은 고모부 장성택 처형 때와는 달리 중앙당 정치국 결정이나 재판절차 없이 체포된지 3일도 안 되어 강건군사학교 사격장에서 강행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전문가들은 현영철의 처형 사유에 대해 “김정은에 대한 불만 표출, 김정은 지시 수차례 불이행, 당 정책 관철에서 태만” 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2015년 4월 24일부터 4월 25일 양일간 진행된 인민군 훈련일군대회에 참가해 주석단에 앉아 김정은이 연설하는 데도 졸았다는 이유가 처형의 이유로 가중되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처형 이후에도 국방위원회 마원춘 설계국장, 인민군총참모부 변인선 작전국장, 중앙당 재정경리부 한광상 재정경리부장 등 많은 고위간부들이 숙청되었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북한 내부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국방위원회 마원춘 설계국장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처음 내정되었을 때부터 옆에서 동행하며 마식령스키장 건설 등 주요건설 대상들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마원춘 설계국장은 ‘순안공항을 주체성과 민족성이 살아나게 건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양강도의 어느 협동농장 농장원으로 배치되었다고 하죠.
인민군 총참모부 변인선 작전국장은 대외 군사협력 문제와 관련해 김정은의 지시에 이견을 제시했다가 크게 질책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 노동당 운영자금과 재산을 관리하는 금융 실세였던 중앙당 재정경리부 한광상 재정경리부장은 김정은의 통치자금 관리에서 비리를 범해 조사를 받고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저의 학급에는 부모가 조선중앙은행 총재, 중앙당 총무부 부부장,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직책에서 근무하던 동창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부모들이 과오를 범해 숙청되어 지방으로 추방되면서 그들은 가졌던 꿈과는 너무도 판이한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국가계획위원회 조영남 부위원장은 평양 대동강 쑥섬에 건설 중인 과학기술전당의 설계에 대해 김정은에게 이견을 제시하고, 미래과학자거리 건설과 관련해서도 “전기부족으로 공사하기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가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6월 남북장관급 회담에 북측 대표로 서울을 방문했던 인물인 내각 부총리 최영건은 산림녹화정책과 관련해 불만을 표출하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총살되었습니다.
김정은은 장성택 처형 이후로 장성택과 연루된 대상들을 모조리 숙청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장성택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처형을 강행했습니다. 이전에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중앙당 조직지도부 간부부에 대한 숙청은 간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 김원홍 부장은 황해남북도 보위부에 과업을 주어 중앙당 조직지도부 간부 부부장이었던 김근섭의 동향자료를 수집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장성택 라인을 제거하기 위한 김정은의 공포정치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김정은이 집권하고 나서 고위간부 처형자 숫자가 집계된 자료를 보면 2012년 3명, 2013년 30여 명, 2014년 40여 명, 2015년에는 60여 명 등으로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를 두고 한국의 서울에 있는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김용현 교수는 “권력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한 김정은이 선택한 통치방식은 바로 공포정치”라면서 “근본적 처방이 없는 한 공포정치의 강도와 범위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청취자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처럼 김정은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공포정치로 유일적 영도체제를 확립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충성경쟁을 유도하려고 꾀했습니다. 김정은 정권 초창기에 장성택의 주변에서 맴돌면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간부들이 무리로 숙청되면서 당, 정권, 군부의 고위간부들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분자들로 꾸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숙청과 처형의 뒤에는 항상 복수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수십여 명의 고위 특권층 간부들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되고 그의 친인척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장성택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한 수천여 명은 지금 어디에서 복수의 칼을 벼를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독재자의 삶은 준엄한 인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죠.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