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지원의 실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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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지난 90년대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난에 허덕이던 북한에 국제사회는 막대한 인도적 지원을 해왔으나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당국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북한에 더 이상 지원을 하면 안 된다며 강력한 대북제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것을 미국의 반공화국 압살정책이라고 선전하지만 유엔의 대북제제 결정은 미국이나 어느 한나라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가입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발사시험을 할 때마다 대북제제의 강도를 높여왔고 지금은 국제적인 봉쇄라고 할 정도로 북한은 지구촌에서 고립되어 모서리(왕따)당하는 실정이라는 사실을 북한 당국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북한은 해방 후부터 막대한 국제사회의 원조와 지원을 받으며 경제를 유지해왔습니다. 특히 구소련은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이 ‘사회주의 동방초소’라고 치켜세우며 밀가루와 기계 등 많은 대북원조를 했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도 북한에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1990년대 동유럽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며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단절하자 경제력이 약했던 북한의 산업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미공급 시기는 죄없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 사태가 해외로 알려지자 독일, 영국 등 서방 자본주의 선진국들과 북한당국이 적대국이라고 선전하던 미국과 일본에서도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막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단체들도 한민족의 아픔을 두고 볼 수만 없어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인 지원해왔습니다. 북한당국은 이러한 국제적인 지원에 대해 감사해야 할 대신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핵개발과 미사일 실험에 광분하다보니 오늘날 유엔이 나서서 대북제제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자력갱생, 자강력을 주장하면서 대북제제에 맞설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지난시기에 국제원조와 지원이 없었더라면 지금만큼의 경제발전마저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북한 당국이 인터넷을 폐쇄하고 외부 소식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국제사회로부터 받았던 원조와 지원에 대해 주민들이 알게 되면 자력갱생은 선동구호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이는 김정은에게 큰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시간에 걸쳐 해방 후부터 북한당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아왔던 원조와 인도적인 지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청취자분들에게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은 해방 후 구소련이 북한에 준 원조와 지원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 대한 구소련의 원조에 대해 설명하자면 당시 북한의 경제형편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북한지역에 광산과 탄광, 제강소 등을 건설하였고 이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철도를 부설하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보다 북한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앞섰던 이유는 이러한 일본의 한반도 개발정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해방되기 전 남북한을 통털어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액의 80%이상이 일본과의 교역이었습니다.

해방 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당시 모든 산업이 일본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는 완성품을 만드는 곳은 한 곳도 없었고 일본의 전시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일본은 항복하면서 열차와 공장, 용광로 등을 파괴하여 북한의 경제는 자체로 회복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해방 후 소련당국은 북한 경제재건을 위해 많은 기술자들을 북한에 파견하였고 이들이 북한에 남겨져 있던 868명의 일본인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북한의 경제복구를 도왔습니다.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소련군정은 일본인 기술자에 대한 등록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였고 1946년 10월에는 북조선공업기술총연맹에 일본인 부를 결성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인 부에 등록된 일본인 기술자는 868명이었지만 평양 소련군 사령부에 등록한 일본인 기술자와 기능자를 모두 합치면 2천 명을 넘었습니다.

당시 닛치쓰 흥남공장과 니혼 고주파 성진공장, 조선염화공업 진남포공장 등 북한 내 많은 공장들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이 종사하였는데 북한을 주둔한 소련군 사령부는 1946년 9월에 연합국 총사령부 대표와 대일이사회 소련대표 사이에 일본인 귀환을 합의하여 12월부터 북한에서 일본인의 정식 귀환이 시작되었지만 기술자들의 귀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에서 파견된 기술자들과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228개의 기업소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복구되었다는 사실은 북한의 도서들에도 서술되어 있습니다. 당시 국립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 「우리나라 인민경제 계획화의 발전」등 많은 도서들에는 해방 후 소련군정이 북한경제복구를 위해 일본인 기술자들과 소련에서 파견된 기술자들의 노력에 대해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당국은 1970년대 초에 이런 도서들이 김일성의 영도력에 대한 선전에서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모두 회수하거나 부분적으로 내용들을 먹칠하였습니다.

어릴 적 기억에 시당 선전부에서 간부들의 집집마다 돌면서 일부 도서들은 회수해가고 남겨진 도서들 중에 까만색의 먹칠로 내용을 지우던 일들이 눈앞에 선합니다. 기술원조와 함께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1946년 한 해 동안에만도 약 2만 5천 톤의 밀과 공작기계 등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일성이 해방 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원조에 대해 1953년 9월에 소련을 방문하여 9월 19일 모스크바 크레물린(크렘린) 오찬에서 한 연설내용만 봐도 당시 소련의 북한에 대한 원조에 대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연설에서 ‘소련 덕분에 해방 후 북한이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고 전쟁도 치를 수 있었다’며 ‘앞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노골적으로 구걸을 청했습니다.

결국 북한당국이 해방 후 나라의 경제발전이 자력갱생정신으로 자체의 힘에 의거해 이룩된 것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소련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진실은 가릴 수 없습니다. 북한당국은 자력갱생, 자강력 등 선전구호로 김씨일가의 영도력에 대해 극구 찬양하려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받았던 원조나 지원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전후 파괴된 북한의 경제회복을 위해 소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북한에 주었던 원조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