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상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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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본명이 김성주로 불리던 김일성의 청년시절에 중국, 특히 길림에서 만났던 연고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어문교원이었던 상월 선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1권 3장 ‘길림시절’, 2절 ‘상월 선생’에서 길림육문중학교 학창시절에 만났던 상월 선생이 김일성이 북한의 수령이 되자, 1950년대에 자신이 쓴 글 ‘나와 소년시절의 김일성원수와의 역사적 관계’와 ‘중국역사강요’를 보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월 선생이 중국인민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할 때 함께 일했던 마연개(馬延凯) 교수가 1988년에 취재차 만난 중국 조선족 출신 재미교포 유순호 작가에게 한 말은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일성도 회고해내지 못한 상월(尙鉞)선생의 본명은 종무(宗武)이고 자는 건암(健庵)이었습니다. 그는 사중오(謝仲五), 정상생(丁祥生), 섭수선(聶樹先), 사반(謝潘) 등 여러 별명을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작가와 학자로서 여러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8년 중국 국공내전이 끝나고 1950년대에 중국인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던 상월 선생은 당시 같은 대학의 선배교수인 곽말약(郭沫若)과 상반되는 역사적 견해를 가졌던 탓에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1892년에 사천성에서 태어난 곽말약 교수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또는 극작가로 유명했는데, 상월 선생은 모택동과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던 곽말약 교수의 견해를 반대하여, 결국 사상투쟁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던 상월 선생은 출당되어 중국 공안부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는데, 당시 공안부 정치보안국장은 과거 항일연군출신으로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투쟁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월 선생의 자료를 보다가 김일성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녔던 사실을 알고 있던 정치보안국장이 상월 선생에게 “당신이 1927년에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면 혹시 북한의 김일성 수상을 알고 있소?”라고 물었고 상월 선생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기에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국장이 재차 상월 선생에게 “북한 김일성 수상이 그때는 김성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어서야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김성주가 지금의 김일성 수상이란 말인가? 그럼 그는 내가 배워준 학생이 맞다. 나는 길림육문중학교 시절 그의 어문교원이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월 선생은 1950년대에 “나와 소년 시절 김일성 수상과의 역사적 관계”라는 회고문을 쓰게 된 것입니다.

상월 선생은 문화혁명시기에도 숙청 대상이 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도 중국공산당의 핍박을 못 이겨 자결하였습니다. 당시 상월 선생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중국공산당 간부들과 인맥이 있는 김일성이 자기를 찾아와 옛 은사로 인정해 주길 바랐으나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바다에 돌 던진 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상월 선생이 보내준 편지를 그가 쓴 글과 함께 받아보았다고 하였는데, 사실 김일성은 상월 선생이 사망한 지 10년이 더 지난 1992년에야 회고록을 발표하면서 갑작스럽게 상월 선생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길림을 떠난 상월 선생은 한때 만주성당위원회에서 비서장으로도 활동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인텔리 출신인 그는 교수로 근무하였을 뿐 실제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김일성보다 10살 위인 상월 선생은 1921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영국문학을 전공했고 노신(魯迅)이 편집하던 ‘망원(莽原)’이라는 잡지에 소설 ‘부배집(釜背集)’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던, 당시로는 다재다능한 젊은 과학도였으며 청년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김일성이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기 2년전인 1926년에 상월 선생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는 중국공산당 창건자의 한사람인 이대소의 영향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고 합니다.

모택동 주석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이대소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기간에 서방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귀국 후 북경대학에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면서 1920년 3월에 베이징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창설하였던 인물입니다.

김일성은 상월 선생을 회고하면서 서두에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라면 고리끼의 ‘어머니’와 ‘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상월 선생이었다. 상월 선생은 육문중학교의 어문교원이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상월 선생의 집 서가에는 수백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며 “그때까지 보아온 서가들 중에서 가장 풍성하고 이채로운 서가였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서가의 지식을 다 섭취하면 대학을 하나쯤 더 다닌 것으로 되지 않을까, 상월 선생이 육문중학교에 온 것은 나를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정신없이 책 구경을 하면서 이 책, 저 책 뽑아보는 김일성을 보고 상월 선생은 “성주야, 한 번에 많이 가져가지 말고 한 권씩만 가져다가 다 읽고 또 와서 다시 가져다 읽거라”고 말하자 김일성은 당시 소문으로만 들었던 ‘홍루몽’을 손에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족 출신 재미교포 유순호 역사학자가 연고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알아낸 당시의 대화내용을 보면 ‘홍루몽’을 보려던 김일성에게 상월 선생은 “네 수준으로는 이 책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니 다른 쉬운 책부터 먼저 읽거라”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그럼 선생님이 추천해주세요. 어느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라고 반문하였고 연고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상월 선생은 김일성에게 특별히 소설 ‘압록강가에서’를 추천했지만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이 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고 ‘홍루몽’, 고리키의 ‘어머니’와 ‘원수들’, ‘소년방랑자’, ‘축복’ 등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습니다.

북한전문가들은 김일성이 소설 ‘압록강가에서(鴨綠江上)’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하여 책 내용이 소련 모스크바동방대학(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 이맹한과 중국, 이란 유학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며, 이맹한과 그의 애인 운고 사이의 연애담이 있는 책이어서 언급을 피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상월 선생의 딸들을 만난 장면을 사진과 함께 설명했지만 사실 상월 선생이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받으려고 보낸 편지들을 외면했으면서, 정작 그가 죽고 자신이 회고록을 쓰게 된 시점에 와서야 딸들인 상가란과 상효원을 만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사실을 숨기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선전에 필요한 것이라면 가짜도 사실인 듯이 꾸며대는 김씨왕조와 북한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왜곡된 역사만들기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