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당국은 해방 후 그리고 6.25전쟁 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 내내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로부터 대북지원을 받으면서 경제건설을 추진해왔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구소련 공산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나서 개인영웅주의를 내세워 스탈린 배격운동을 벌리면서 소련과 북한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대북원조에서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전후 1954년과 1955년, 1956년 3개년 계획이 끝나고 1957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어야 했으나 북한당국이 내세운 계획내용에 대한 소련당국의 부정적인 인식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1957년부터 진행될 1차 5개년 계획에 대해 당 제3차대회에서 제시하였지만 소련 내에서도 스탈린의 중공업 중시노선보다 경공업 중시노선을 내세웠던 흐루시초프는 북한당국의 중공업 중시노선에 대해서도 반대하였습니다.
1956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동안 진행된 당 제3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농업의 협동화와 개인적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끝내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구축하며 인민의 의식주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한다며 그러자면 중공업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은 당 제3차 대회에서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 계획이 성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사심 없는 경제적, 기술적 원조 덕분이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5개년 계획 기간에 인민경제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공업이 담당할 것이라며 그 이유에 대해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인민경제 모든 분야에서 확대 재생산을 보장할 수 없으며 인민경제의 기술적 재건과 노동생산능률의 끊임없는 장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957년부터 1961년 사이, 5년간 진행될 1차 5개년 계획 달성을 위한 결정서에는 “제1차 5개년 인민경제발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낙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며 농업협동화는 물론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도 완성한다”며 처음으로 ‘자립적 민족경제’라는 용어가 공개되었습니다.
김일성은 5개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북한 주재 사회주의 국가 대사들과의 회담을 진행하면서 북한당국의 중공업 우선 방침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은 대사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중공업을 발전시킬 것이며 정교한 장비를 제외하고 우리 경제를 위한 모든 기계들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차 5개년 계획이 작성되던 1956년은 북한이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던 시기였습니다. 흐루시초프의 ‘개인영웅주의’ 배격노선에 따라 내부적으로는 노동당 내 소위 ‘교조주의’와 ‘수정주의’ 투쟁이 격화되던 시기였고 이에 대립되어 있던 연안파의 최창익, 김두봉과 소련파인 박창옥, 박영민 등이 숙청되면서 소련정부의 경제원조가 격감되었습니다.
소련공산당과 소련정부는 중공업 우선정책을 주장하는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무상원조 형태의 경제원조를 대폭 삭감하여 장기 차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1956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곳곳에 나붙어 있던 ‘소련으로부터 배우자’는 구호가 사라졌고 자립경제노선이 대두되면서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천리마 운동이 제창되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제1비서로 선출된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 우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미국과 화해하는 의지를 표방하는 평화공존론을 내세웠습니다. 중국공산당은 흐루시초프의 개인숭배 비판이 모택동(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고 흐루시초프에 대해 반감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1957년 11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모스크바 회의에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주장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당시 소련정부는 미국과 화해하고 서방과 평화공존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중국정부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회주의 국가 간의 단결을 강조했습니다. 모스크바 선언 채택을 위해 중국 모택동(마오쩌둥)주석을 포함한 12개 국가 공산당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평화공존론과 모택동의 전쟁불가피론은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이 국가들에 대한 경제원조에 의존하던 북한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일성은 제1차 5개년 인민경제 발전 계획 실행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대규모 경제 기술 원조를 받으려고 1956년 4월 23일 당 제3차 당대회가 끝난 이틀 만에 소련을 방문하였고 한 달 후인 5월 21일에는 외무부 남일 외상을 소련과 체스코슬로벤스코, 동독에 보내서 원조를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한편 김일성은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에 파견된 대사들을 소집하여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 계획이 잘 마무리 되었으나 앞으로 해야 할 제1차 5개년 인민경제발전 계획을 진행하자면 10억 루블이 부족하다”며 이 규모의 원조가 없으면 5개년 계획을 수행할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소련주재 북한대사였던 이상조는 소련정부에 식량부족과 주택문제 등 북한의 심각한 경제형편을 소개하면서 소련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야 한다고 호소하였고 동독 주재 북한대사인 박길용은 동독정부에 제1차 5개년 인민경제발전 계획수행을 달성하자면 약 10억 루블의 원조가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각국 대사들이 해당 나라 정부에 원조 요청을 하고 나서 김일성은 1956년 6월 1일 소련을 시작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이끈 대표단은 6월 1일부터 6일까지 소련을 방문했고 6월 7일부터 13일까지는 동독, 13일부터 17일까지는 로므니아(루마니아), 17일부터 20일까지는 웽그리아(헝가리), 21일부터 25일까지는 체스코슬로벤스코(체스코슬로바키아), 6월 25일부터 29일까지는 벌가리아(불가리아), 29일부터 7월 2일까지는 알바니아, 7월 2일부터 6일까지는 뽈스카(폴란드)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6일부터 16일 사이에는 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최종적으로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17일부터 19일까지는 몽골을 방문하였습니다. 결국 50여 일에 걸친 김일성의 이 방문은 원조구걸행각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구상에 국가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장장 50여일 동안이나 원조구걸을 목적으로 국가지도자가 다른 나라를 방문한 일은 동서고금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일성은 방문목적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친선과 경제협력을 위한 방문”이라고 주장하였고 해방 후 건국사업과 전쟁시기, 그리고 전후 인민경제 복구기간에 원조와 지지를 보내준 사회주의 국가 정부와 인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북한 정부대표단은 방문기간에 동독 정부와 ‘경제 및 문화 협조에 관한 협정’을, 헝가리 정부와 ‘문화 협조에 관한 협정 및 1956년-1958년간 상품 납입에 관한 협정’을, 불가리아 정부와 ‘1956년-1958년간 경제적 원조 제공에 대한 협정’을, 소련 정부와 ‘문화 협조에 관한 협정’등을 체결하였습니다.
50여일에 걸치는 김일성이 이끈 북한 정부대표단의 유럽방문에도 불과하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의 원조요청에 대한 반응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지난 전후 복구건설을 위해 북한에 제공한 원조에 대한 북한정권의 진정성 없는 표현이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 나라들의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북한에 제공된 원조와 그것이 북한의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을 말씀드리도록 하고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