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1945년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6.25남침전쟁을 일으킨데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일성에 의해 일어난 6.25남침전쟁은 한반도를 잿더미로 뒤집어 놓았으며 391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소위 ‘대한민국을 해방 시킨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을 망라한 유엔군에 의해 자신의 공산적화 야망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6.25전쟁 후 북한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공장들과 도시의 주택들, 농촌마을, 논밭 그 어디에 가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없었으며 기아와 전염병으로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북한주민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전범자인 자신에게 쏠릴 것이라고 생각한 김일성은 전쟁을 미국과 남조선군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선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북침설’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선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남침전쟁을 준비했던 행위들을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봅니다. 1949년 2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구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 비밀회담을 진행하였고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에 또다시 소련을 방문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5월에는 중국을 방문해서 결국 스탈린과 모택동으로부터 전쟁계획을 모두 승인받았습니다. 그러는 한편 김일성은 1949년 6월에 70여 개의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를 망라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했습니다. 또한 6.25남침전쟁을 개시하기 1주일 전까지 미군 철수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철퇴,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였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구소련의 레닌의 저서 ‘공산주의 좌익소아병’에 적힌 “다른 세력일지라도 기본목표 수행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이면 동맹군으로 삼고 주적을 압박하는 우회공격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내용에 따라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제시한 통일전선 전략 즉 “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는 계급주의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공산당이 아직 정권을 잡지 못한 어려운 시기에는 우선, 이용가치가 있는 계층이 싫어할 구호를 미리 성급하게 내걸지 말고 그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그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전략도 활용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일전선’이란 공산당이 일정한 혁명단계에서 주적을 타도하는데 공산당 세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때 필요한 동조세력을 확보하고 그들과 잠정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하여 투쟁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북한당국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해방 직후부터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남사업부문에서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3일 각 도당 책임일꾼 협의회에서 한 연설 ‘새조선 건설과 민족통일전선에 대하여’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쟁취하고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면 공산당 대열을 강화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남조선 혁명에서 통일전선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체계화할 것에 대해 강조했고 이는 김일성 시대로 그치지 않았으며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는 현재까지도 북한당국은 통일전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통일전선을 “공동의 적을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당과 사회단체 등 정치조직들의 통일된 연합”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노동당의 전위조직들인 근로단체들과 다양한 정치조직들을 보조역량으로 보고 광범위한 군중들을 통일전선운동에 묶어세워 남조선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여전히 강조하고 있죠.
그리고 “남조선 혁명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성사시키기 위해 광범한 각계각층 군중과의 통일전선을 이룩하는 것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혁명승리의 필수적인 담보가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미제를 축출하고 대한민국정부를 붕괴시키는데에 한국 내에 존재하는 용공세력, 종북세력의 힘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여 비록 공산세력이 아닐지라도 미국과 현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단체나 세력을 규합하여 이들의 힘으로 현 정권을 타도하고 그들의 정권을 수립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1950년 6월 7일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명의로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여 남북한을 통합한 최고 입법기관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의 이러한 주장과 북한당국의 행위는 6.25 남침계획을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산당 세력이 아무 때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죠. 우선 북한의 통일전선 형성원칙을 보면 조직원칙으로 계급노선을 견지하며 군중노선을 결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전선 형성에서 전술상의 원칙으로는 첫째로 하층통일전선을 기본으로 하며 상층통일전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둘째로 낮은 형태의 공동투쟁을 점차 높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부분적인 연합에서 전면적인 연합으로 발전시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통일전선 내에서 노동당의 정책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중간층 민족 자본가들과도 단결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적화통일, 공산화를 위한 투쟁이 기본임무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김일성은 6.25 기습남침 전쟁을 감행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에는 평양방송 연설을 통해서 “우리 조선인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발 아래 조국의 통일, 하나의 독립된 민주국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위해서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기필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전쟁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다닐 때 저의 학급에 아버지의 고향이 한국인 동창이 있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쟁 이전에 전라남도 여수시의 한 면의 면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해마다 평양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가하곤 하였습니다. 제 친구가 말하기를 그의 할아버지가 전쟁 때에 북한인민군의 선전에 속아서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인민군 병사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후에 고향에 못가고 북한에서 살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전쟁 시기 통일전선의 미명하에 북한군에 속아서 타향인 북한에서 살고 있는 남조선 출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북한당국은 소위 미제국주의로부터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한다는 미명하에 ‘남조선혁명전략’과 ‘통일전선전술’의 지속강화 전략노선의 일환이었던 ‘반미구국통일전선’을 결성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지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며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을 핵심으로 한 광범한 각계각층의 애국적 민주역량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묶어세우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반미구국통일전선을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의 반미구국통일전선 전략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적화통일과 나아가서는 온 겨레를 현대판 김씨왕조의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한 반민족적, 반인륜적인 행위이며 이와 같은 반민족적인 통일전선은 오늘날에는 온 겨레는 물론 전 세계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