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은 해방 후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6.25남침전쟁을 일으켰으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6.25남침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위해 대남전략에 골몰하였으며 남한의 공산화 통일 전략 실현을 위해 1965년 11월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통일혁명당 창당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당시 북한의 실정에서 정치적 혼란한 상태에 있던 남한의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공산적화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고 보고 본격적인 대남혁명의 공세전환 준비에 착수하도록 대남공작기관들에 과업을 하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61년 1월 노동당 연락부, 민족보위성, 정찰국, 내무성 반탐정처 등 대남공작기관들을 통합하여 ‘노동당 연락국’으로 개편하고 초대 연락국장에 이효순을 임명하여 대남공작 공세를 전개하면서, 가장 먼저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위해 공작원을 활용하는 ‘통일전선전술’을 전개하도록 했습니다.
6.25남침전쟁으로 남한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인 남로당 세력이 붕괴되고 빨치산 세력들도 괴멸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북한 대남공작기관들은 서해와 남해안 일대에 공작사업을 위한 엄호연락거점들을 구축하고 동조세력들을 규합하며 이를 토대로 지하당 구축을 꾀하였습니다. 지하당 구축의 첫 단계로는 공작원들을 남한에 파견하여 한국의 상층부 인물들을 포섭한 후 직업적 혁명가로 육성시켜 지하당 핵심진지를 구축한 다음에 그들이 노동자와 농민, 청년 또는 학생들 속에 침투해 대중을 선동하여 조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서는 전후 남한 출신들 중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용공분자들을 공작원으로 양성하여 남한에 간첩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중에서 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인 김수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수영은 1961년 12월에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침투하여 동생 김수상과 외삼촌 최영도를 포섭해서 그들도 북한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도록 했고, 그 다음 해인 1962년에는 빨치산 출신인 정태묵을 포섭하여 밀입북 시켜서 간첩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당시 김수영의 외삼촌 최영도는 전라남도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고 그 이후 세 차례나 평양을 몰래 방북하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하였습니다. 당시 통일혁명당은 전국 조직이 아닌 북한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전라남도의 지하당조직에 불과했고 최영도는 전라남도당 책임자에 불과한 인물이었습니다.
최영도는 1950년대 남로당 전라남도당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종북, 반국가범죄로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살고 출소한 정태묵을 포섭하였습니다. 정태묵은 1965년 3월에 김수영과 함께 월북하여 노동당 대남연락국장인 이효순을 만났고 노동당에 입당하였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에서 지하당 조직을 창설하고 운영하는 방법 등 소위 간첩교육을 마친 정태묵은 무전기 3대와 난수표 1매를 받아가지고 남한으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전라남도에 지하당조직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수영의 동생 김수상도 월북하여 북한에서 6개월간 간첩교육을 받고 자신과 친분이 있던 대구출신 김종태를 포섭하였으며, 김종태는 김수상의 포섭 제의에 호응하여 최영도를 접촉한 이후 1964년 3월 김수상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북한에서 생산하는 열차공장의 이름에 들어있는 김종태라는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김수상이 북한 대남통전부에 소개한 김종태는 대구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시절에 공산서적들을 읽으면서 공산주의사상에 심취되었고 해방 후에도 북한의 공산화를 적극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해방 후 한국의 동국대학교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좌익단체활동을 주도해왔던 김종태는 북한의 대남통전부의 협조연락을 받고 그 이후 4차례나 월북하여 김일성을 접견한 후 평양 교외의 초대소에서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간첩교육을 받고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김종태는 김일성으로부터 “남조선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선동적인 조직을 형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김종태가 북한으로부터 받은 공작자금은 당시 한국 돈 800만원, 약 3만 달러에 달한 돈이었습니다. 당시 37살이었던 김종태가 김일성으로 받은 임무는 남한 내에 지하당조직을 건설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선전물인 잡지 「청맥」을 발간하여 청년학생들과 지식인, 나아가서는 남한주민들에게 반미, 반국가사상을 고취하여 한국을 북한체제에 서서히 흡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1965년 4월에 김종태를 다시 북한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당시 북한 대남사업총국장이었던 이효순은 김종태에게 “남조선에 지하당을 창당하고 그 명칭을 ‘통일혁명당’으로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김종태를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 서울시위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시 통일혁명당 창당을 위한 공작자금으로 김종태가 북한에서 받은 돈은 당시 한국 돈 1,815만원 즉 6만 6천 달러에 달했습니다.
서울로 남파된 김종태는 1965년 11월에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회장이 되어 서울대 출신인 조카 김질락과, 그의 서울대 동문 이문규를 포섭하여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습니다. 김질락과 이문규도 1967년 5월에 월북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다시 한국으로 남파되었습니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 위원장으로, 김질락과 이문규는 각각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신영복, 이재학 등 다수의 인텔리를 포섭하여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청년학생층에게 공산주의 사상, 친북사상을 전파했습니다.
반미, 친북, 공산주의 사상이 학생과 인텔리들 속에서 퍼져나가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정태연과 정태묵 형제가 김종태의 지지를 받으면서 지하당을 결성했고 경상북도지역에서는 경북대학교 김대수 교수가 지하당조직을 결성하려다가 1967년에 수사당국에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서울과 전남, 경북 세 지역에 조직된 통일혁명당 지하당 조직들은 노동당 대남통전부의 지령으로 지하당의 구축과 조직 강화, 각종 학술연구모임 조직, 당 소조 구축과 이동문고를 통한 사상교육, 모든 조직을 미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사상적 준비와 전술 간부의 획득, 무력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과 준비,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 획득 및 비축방법 연구, 특수전술 교관의 양성, 발행지 「청맥」의 내용 보강, ‘민족통일전선’ 구성을 위한 연합전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노동당 남한 내 지하당조직으로 성장하려고 했던 통일혁명당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로 서울과 경기도, 인천 등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과 정부 전복을 위한 활동으로 한국정부를 붕괴시키려 했으나 1968년에 대한민국의 안보수사당국에 의해 일망타진되었습니다. 당시 검거된 총인원은 158명으로, 통일혁명당 괴수인 김종태는 사형되었습니다. 이문규 등 4명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면서 통일혁명당은 와해되었으며 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조직인 통일혁명당은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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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