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1호도로(1) - 금성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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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북한의 이른바 ‘1호도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1호도로’ 중에서도 금성거리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려 합니다. 우선 북한에서 ‘1호’라고 하면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참석한 행사를 ‘1호행사’,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1호사진’, 김일성 역을 맡아 한 배우를 ‘1호배우’, 김씨 3부자가 나오는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찍는 촬영가를 ‘1호촬영가’, 김씨일가를 형상한 미술작품을 그리는 화가를 ‘1호화가’ 등 북한에서 1호는 김씨왕조와 관련된 대명사입니다.

마찬가지로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북한에 있는데 바로 이것이 ‘1호도로’입니다. 1호도로는 평양에도 있고 지방에도 있으며 단독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평양도심의 일반도로 중앙선에 표시하여 다른 차들이 들어서지 못하게 통제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그 나라의 대통령만 다니게 만들어 놓은 이런 1호도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성거리는 용흥네거리에서 합장교까지 약 10여리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입니다. 425문화회관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방향으로 직선으로 길게 뻗은 이 도로는 금수산태양궁전 앞도로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로의 양쪽으로는 평양시 대성구역 룡흥동과 룡북동, 룡남동 그리고 모란봉구역 전우동이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1963년에 건설된 금성거리는 1977년, 김일성의 생일 65돌을 맞으면서 금수산의사당이 건설되면서 1호도로로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의 통행이 가능하였고 시내버스도 다니던 이 금성거리는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은 호위사령부가 통제하는 도로로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1980년 1월에 김일성종합대학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전국수학경연대회에 참가하러 올라갔다가 보았던, 금성도로를 새로 건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북한에서 처음으로 진행되었던 제1차 전국수학경연대회에 양강도 대표로 평양에 올라가니 경연장소가 김일성종합대학 과학도서관이어서 종합대학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시험을 치르느라 일주일동안 13호기숙사에 들었던 나는 밤에도 금성거리에서 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금성거리는 김일성의 저택이자 일을 보던 주석궁전인 금수산의사당에서 나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2호교사인 22층교사의 맞은편 길 건너에 위치해 있던 5층짜리 기숙사 7호부터 13호기숙사 7개 동의 건물 중에서 12호와 13호 기숙사는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도로에 나가보니 대낮처럼 밝은 도로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사현장에는 대형건설장비들과 몇몇 노동자들뿐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살면서 도로 공사를 할 때면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이 사람이 꽉 들어차서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던 모습과 너무도 딴 판이었습니다. 텔레비죤에서 보았던 평양의 도로공사 모습과도 다른 한적한 공사현장이었습니다.

오래 된 도로를 부수는 작업도 어른 키보다 더 높고 독보다 둘레가 더 큰 쇳덩어리를 기계가 들었다가 내리치면서 파괴하였고 사람 손처럼 생긴 기계가 집채만한 도로바닥블로크들을 뜯어내어 화물자동차(트럭)에 실었습니다. 너무도 신기하여 저편에서 담배를 피면서 쉬고 있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가서 ‘건설장비’들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머리만을 좌우로 흔들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고 어느새 간부로 보이는 사복을 입은 사람이 달려와서 나에게 ‘너는 어디서 사는 애냐’고 물었습니다. 수학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양강도 대표로 올라온 누구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분은 일본인이어서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그를 가리키며 일본에서 온 도로건설 기술자이고 이 장비들은 그들이 직접 일본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낮에 나와 보니 낮에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여전히 건설장비들인 동력함마와 카토, 트럭 등 도합 10대 정도에 사람도 수십 명뿐이었고 일본인들은 기술자들이었고 장비운전사들은 북한노동자들이었습니다. 한쪽으로 완성된 도로에서는 도로바닥 균질성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양쪽에 도르래바퀴가 달리고 가운데 설치된 그라프용지에 검사파가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도로의 품질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대학에 입학하여 그 도로를 지나다니면서 비가와도 어느 한곳에도 빗물이 고이지 않는 도로를 보면서 정말 도로가 고급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1976년부터 김정일은 김정은의 친어머니인 고영희와 동거하였는데 재포출신이었던 고영희가 일본의 도로에 대해 김정일에게 말해주어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들여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되기 이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들도 금성거리를 1호도로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김일성종합대학 울타리가 있던 금성거리 보도블로크의 구간은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들이 학부별로 맡았는데 그때 ‘1호도로 담당구간 눈치기’한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종합대학에서 주석궁전인 금수산의사당으로 가는 방향에는 도로 한가운데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가까이에 접근하려고 하면 호위사령부 군인들이 자동보총을 내대며 ‘섯, 다가오지 말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도로에는 항시적으로 사복을 입은 호위요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425문화회관에서 금수산태양궁전 방향으로 난 금성거리 입구에는 1997년 7월에 김일성 사망 3주기를 맞으면서 제막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새겨진 대형 영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높이가 90m가 넘는 이 영생탑은 24시간 북한의 보위부가 지키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당시 영생탑을 건립하고 나서 '위인의 자욱으로 빛나는 거리'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영상물에서 북한정권은 금성거리는 김일성 주석의 생전 모습과 사연이 깃든 '추억의 거리'라며 "광복 후부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1만 8천여 개의 단위에 대한 현지지도와 54차에 걸쳐 연 87개 나라들에 대한 공식, 비공식방문, 총 연장거리 130만 6천 150여리의 노정이 바로 이 거리에서 시작됐다"고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은은 선대 수령들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금성거리라고 부르던 이 거리 이름마저 여명거리라고 개명하였습니다. 북한정권은 '조선혁명의 려명이 밝아온다'는 의미를 담아 여명거리(려명거리)로 명명했다고 선전하기도 합니다.

북한정권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평양시에 천리마거리, 창광거리, 문수거리, 광복거리, 통일거리 등 대규모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난으로 어려워지면서 평양시 건설이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에 들뜬 김정은이 후계자로 되면서 북한주민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공업품 대신에 업적 쌓기 차원의 대규모공사를 벌렸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전거리, 은하거리,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로의 발전수준은 그 나라의 경제발전수준을 나타냅니다. 2016년 IMF(국제통화기금)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에서 174위로 가장 빈곤한 나라에 속합니다. 새로 건설된 여명거리의 총세대수는 4천 8백여 세대로서 5천세대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수십 개의 건설회사 중에서 한 회사가 1년 동안에 건설하는 세대수보다도 더 적은 숫자입니다.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정권은 여명거리 건설을 통하여 주민들의 체제결속을 유도하고 대외적으로는 김정은이 인민의 지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꾀한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면서 전자공학 수업은 2호교사인 22층에서 받았는데 그때마다 금수산의사당 방향의 창문들은 열 수도 없었고 창문에는 흰색 뼁끼(페인트)를 칠하여 밖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창문을 열고 내려다볼 수 있었다면 당시 살아있는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 주석궁전 마당에 있는 모습이 보였을 거라고 봅니다. 지금도 여명거리가 건설되어 금수산태양궁전 가까이에 건설된 아파트들에는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 호위사령부 간부들이 집중적으로 입주하여 주민들 속에서도 ‘려명거리는 금수산태양궁전을 호위하는 장벽’이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인민의 지도자라고 하면서 인민과 장벽을 쌓고 도로마저 1호도로를 만들어 차별을 두면서도 마치나 북한이 평등한 사회인 것처럼 떠드는 김정은과 북한정권은 이미 인민들과 기름과 물처럼 도저히 한데 섞일 수 없는 체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북한 인민들은 김씨 3대의 거짓선전과 위선으로 인해 환멸에 차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인민의 심부름꾼이 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