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성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사진과 함께 7페이지에 걸쳐 회고한 김일성의 첫 애인이었던 한영애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1930년 5.30폭동으로 시작된 일제의 대검거로 감옥살이했던 김일성이 석방 후에 다시 잡혀가는 것이 두려워 피해 달아난 곳은 길림성 교하시(蛟河市)입니다.
김일성이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길림여중을 다녔던 한영애의 고향이 교하였기에 김일성은 교하에 와서 한영애를 찾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이 한영애의 집을 찾아갔다가 뒤따르던 경찰의 눈을 피해 한영애의 옆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아이를 업고 불을 피우는 시늉을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은 교하에 와서 숨을 곳을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친구인 독립군 중대장 출신 장철호와 이재순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자 그때에 얻은 뼈저린 교훈에 대해 “사상적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친구도 다 소용없다, 지난날의 친분 관계나 인정만 가지고서는 혁명 투쟁을 함께 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습니다.
한영애의 옆집 주인의 안내로 교하시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노인 부부가 사는 외딴 초막에서 하룻밤 지새고 다음 날 날이 밝자 그를 찾아온 한영애를 만나게 됩니다. 김일성은 그때의 감정을 “우리로서는 1년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고생 끝에 그를 만나고 보니 어떻게 반가웠든지 한동안은 말도 못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고 회상합니다.
김일성은 한영애에게 살벌한 동만주 지역보다 덜 위험한 북만주 일대로 가자고 말했고 결국 둘은 하얼빈으로 떠나게 됩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국제당과의 연계를 짓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다”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외톨이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경계가 심한 상황에서 중국 사람으로 변장하고 차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한영애는 교하 시내와 주변의 아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입고 갈 중국 옷과 신발, 그리고 여비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김일성과 한영애는 부부로 위장해 교하에서 500여 리나 떨어져 있는 하얼빈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지만, 하얼빈에 도착해서 거처를 찾기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18살이었던 김일성이 부부 차림으로 하얼빈으로 간 것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당시는 10대에 조혼이 성행하던 시기여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김일성은 김혁이 체포하러 들이닥친 일제 경찰을 피해 3층에서 떨어졌다가 잡혀 감옥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침통한 기분으로 지냈다”고 ‘세기와 더불어’에 회고하고 있습니다.
또 김일성은 국제당 중국공산당 하얼빈 지부를 찾아 젊은 청년들을 찾아내 하얼빈 공청 조직에 인입시키는 일을 하는 대가로 하루에 15전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하루에 용돈으로 주는 15전으로 하얼빈 생활을 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며 “식사는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한영애와 함께 거리에 나가 눅거리 강낭지짐을 한 두 점 사먹는 것으로 굼때었다”고 하였습니다.
한창 성숙한 나이의 김일성과 한영애의 동거 생활은 1930년 여름까지 지속되었고 하얼빈 생활에 싫증을 느낀 김일성이 한영애만 남기고 홀로 돈화 지방으로 떠나면서 이것이 둘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해 가을, 한영애가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는 소식을 1938년에야 김일성은 이종락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옥 후 한영애는 신의주 맞은편 중국 단동시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일했고 서울에도 나가 몇 년 동안 살았습니다.
한영애와 헤어진 김일성은 본명인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고치고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다가 1940년에는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공산당 산하 붉은군대 88저격여단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였으니 한영애가 아무리 찾아 헤맸어도 찾을 리 만무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을 찾을 수 없었던 한영애는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영애도 평양에 왔다가 1951년 8월 14일 밤에 폭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영애가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으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고 한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영애를 회고하면서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청춘 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곤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한영애에 대한 김일성의 회고 내용을 보면서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복무하다가 해방 후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고 종파 숙청이 한창이던 1959년에 소련으로 돌아갔던 유성철의 증언 수기 내용을 다시 되새겨보게 됩니다.
김일성과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유성철은 김일성이 한영애와 헤어지고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면서 그 부대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던 한성희라는 여성을 만나 동거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그 후 1937년에 김정숙과 교제를 시작했던 김일성은 1940년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한 시점에 소련으로 피신했고 1941년 2월 16일 김정일을 소련에서 낳았으며, 김정일이 소련식 이름인 김유라로 불렸다는 사실도 소련군에서 김일성과 함께 복무하였던 유성철에 의해 알려진 내용입니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후 북한 사회보안부 부부장 김성국의 타자수로 일했던 김성애가 욕심이 났던 김일성은 부관을 시켜 김성애를 자기의 비서로 두면서 결국 김정숙이 사망한 후 후처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여성 편력은 김성애 외에도 한 인민군 고급 군관의 부인이 마음에 들자 그 군관을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 여성도 농락했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오찬복이라는 타자수에게 키스하려다가 귀빰을 맞기도 했다고 유성철은 증언하였습니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여성 편력도 그 수위가 도를 넘었다는 것이 비밀이 아닙니다. 김정은이 2016년 말레이시아에서 독살시킨 이복형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과 김일성의 타자수였던 김정일의 본처 김영숙, 첩에 불과했던 기쁨조 출신 만수대예술단 무용 배우였던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 생의 마지막에 함께 동거하였던 김옥 등이 공개된 여성이고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진 여성들도 존재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소개된 한영애의 인생과 그에 대한 회고담을 살펴보면 ‘세기와 더불어’가 얼마나 본인의 입장에만 유리하게 왜곡됐으며 왜 이 책이 가짜 역사 도서라고 불리는지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