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대남전략을 위한 반미구국통일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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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평양시 서성구역에는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 있습니다. 이 공장 명칭의 주인공인 김종태는 1960년대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통일혁명당’을 이끌었던 인물이지만 1968년 대한민국에서 간첩으로 사형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7월 한국에 있던 ‘통일혁명당’ 조직원들도 일망타진되면서 통일혁명당은 합법적인 조직이 아닌 북한이 관할하는 한국의 지하당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대한민국 주민들을 대상으로 통일혁명당중앙위원회 명의의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였는데, 이 방송에서는 여전히 통일혁명당이 건재하고 있는 듯이 거짓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1970년 6월 1일부터 통일혁명당중앙위원회 방송을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비난과 김일성 우상화, 북한 체제선전을 위주로 방송하였습니다.

1969년에 대한민국에서 통일혁명당은 지하당으로 존재하면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수행하는 노동당의 한국 지부당으로 활동해오다가, 1985년 7월 27일에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1985년 8월 8일부터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을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개칭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 명의로 담화, 성명, 호소문, 시국 해설, 논설, 투쟁지침, 구호 등을 내려 보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가 내세운 대남전략은 우선 “미군을 남한을 점령한 침략자,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민들에게 유포시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남혁명전략은 반봉건, 반자본주의 관점으로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이 성분제도나 3대 세습, 일당 독재, 유일적인 집권주의 등이 현대판봉건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북한은 오히려 “한국에 여전히 지주가 존재한다며 통일의 목적이 역사발전단계에서 거쳐야 하는 반봉건적인 이념투쟁”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남혁명전략의 세 번째 전략으로는 혁명기지론이었습니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부터 전 조선에서 사회주의혁명 완수를 위해 북한 지역을 ‘민주기지’로 삼고 소위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쟁준비를 해왔으며 1950년 6월 25일에 구소련의 모스크바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락을 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국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허물고 북한 같은 김일성의 일당독재국가를 만들려 했으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는데다 남한에서 주민들이 반미구호, 미군철수 구호를 들고 싸우도록 하기 위한 전략을 대남전략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북한의 대남통전부는 반미, 미군철수 등 반미구국통일전선의 과업을 제시하면서 이를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특징에 대해 첫째로 남한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민족적 자주권과 존엄을 실현하며, 둘째로 착취와 압박을 청산하고 근로민중이 참다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사회를 세우며, 셋째로 민족자주세력과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대중이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가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민중적인 변혁운동이 되도록 하며, 넷째로 ‘선 민족해방, 후 계급해방’으로 반미운동을 가장 첫 자리에 놓았습니다.

1980년대에는 북한 대남통전부 산하 연락소들에서 파견된 남파간첩들에 의해 한국 곳곳에서 각종 집회와 시위, 방화, 폭동 등이 일어났고 한국은 국가안보 위기상태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 중에 한국에서 체포된 김동식(가명)의 증언을 보면 북한 대남통전부의 대남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황해남도 용연군에서 태어난 김동식은 고등중학교 4학년 때에 중앙당 담화를 거쳐 공작원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고등중학교 5학년에 올라가 1년 동안 수십 번의 신체검사와 군당, 도당, 중앙당 간부 담화를 통과하고 합격해 해주의 도당청사에 모이니 황해남도에서 같은 해 합격한 동창들이 200여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동식은 1981년 3월에 대남공작원을 양성하는 평양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학과 수업과 함께 야간행군, 100리 달리기, 사격, 격술, 수영, 접선 등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손바닥만한 야전삽으로 1.5 톤 트럭 한 대 분량의 흙을 파내야 하는 훈련만 해도 대학 시절 100여 개를 파야 했고, 잠수와 수영 훈련은 20일간 하루 7~8시간을 물 속에서 살다시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공작활동을 하려면 한국말을 해야 하겠기에 서울 토박이 출신의 한국말 강사와 1년간 합숙하면서 서울 말씨와 남한의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의 상식을 익히는, 실제 남한생활 같은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김동식은 먼저 남한에서 활동하던 고정간첩 이선실을 무사히 북으로 데려오고 남한 사람 두 명을 포섭한 공로로 1990년에 1차 남파공작 성과를 인정받아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5년 두 번째 남파공작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남한 운동권 학생 출신 7명을 만났지만 포섭에는 실패했고 이미 한국으로 전향한 고정간첩 ‘봉화 1호’의 제보로 충청남도 부여에서 매복 경찰에 추격을 받던 중 총상을 입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이로써 그의 15년간의 공작원 생활은 끝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북한의 청년들이 김씨 일가의 영원한 현대판봉건독재국가를 위해 귀한 생명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들은 김씨 일가의 부귀영화를 위한 세습독재국가의 희생양이며 현대판 노예일 따름입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통일대상범위도 종교인으로 확대해 통일전략 실현을 위한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당국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만들었으며 평양에 칠골교회, 봉수교회, 장충성당 등 교회건물들을 짓고 대외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듯이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중국이나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들마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은 시련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1990년대 북한에 들이닥친 고난의 행군은 한국에서 북한을 동경하던 주체사상파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의문점을 낳게 하였고 허울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과 체제는 진정한 인민대중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착취계급, 공산독재의 고위층들에게만 부귀영화인 나라임을 알게 되었고 이들의 전향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지난날엔 북한체제를 동경하고 한국사회를 붕괴하려고 했던, 소위 반정부인사들과 청년학생들은 더 이상 북한에 대한 환상에 속지 않았으며 오히려 북한의 민주화와 북한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애국세력으로 변화했습니다.

1980년대에 잘못된 선전에 속아서 월북하여 북한으로 갔던 의거입북자는 1990년대 이후로는 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오는 탈북민 대열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약 3만 4천여 명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해 살고 있습니다.

북한의 거짓선전에 속아 북한 체제를 찬양하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허물려고 반정부시위에 참가했다가 귀한 목숨을 잃은 한국의 청년들의 죽음의 대가는 현대판 김씨 왕조 국가의 붕괴를 앞당겨올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야 한국의 발전된 경제 그리고 세계가 다 잘 아는 삼성이나 현대 등 특대형의 회사들이 모두 미국의 독점재벌이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며 미군도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국제주의 성격을 띠고 주둔한 침략군이 아닌 동맹군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반미구국통일전선은 허울뿐인 통일전략 수행을 위한 기구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