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의 민주기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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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 대남통전부의 지령으로 한국에 창설된 통일혁명당은 김종태를 비롯한 핵심인물들이 사형되면서 없어지는 듯 했지만 1970년대 이후, 북한 대남통전부는 한국에 지하당 조직 인혁당과 남민전 등을 만들며 적화통일야망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김일성의 남한 ‘민주기지론’은 해방 이후에 대남통일전략으로 정해졌고 김일성은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면서 남한을 점령하려 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전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북한은 빠른 시간에 전후복구건설을 마무리하고 사회주의 공업국가로서의 토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성되던 1960년에 한국에서 4.19혁명이 일어나자 김일성은 다시 대남혁명전략을 정비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61년 9월에 진행된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남조선 혁명의 기본요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철수와 식민지 통치의 분쇄”라고 주장하였고 “그러자면 남한에도 혁명의 기본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혁명적 당을 창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발생한 4.19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해 “혁명적 당과 명확한 투쟁지침이 없어서 노동자, 농민이 항쟁에 참가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면서 “남조선에 혁명적 당을 건설하여 그 주위에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과 광범한 인민대중을 참가시켜 그들에게 명확한 투쟁 강령을 제시하고 군중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김일성의 ‘민주기지론’ 대남전략에 따라 노동당 대남통전부는 남한 내에 지하당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고 지하당 운영은 조선노동당 규약의 규정에 의해 조선노동당의 일반원칙과는 다르게 지하당 조직원칙에 의해 운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노동당 규약 20조에는 “당중앙위원회는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과 부문, 특수한 환경에 맞는 당조직의 형식과 활동방법, 그 밖의 당건설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따로 결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대남통전부가 남한에 창설된 지하당 조직들에 하달한 지시 중에는 ‘지하당을 조직할 때는 정수분자들만으로 구성해야 하며 간결성의 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 ‘지하당의 구성원은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고 당원의 자격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며 ‘조직이 간결하여야 수사기관으로부터 조직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고 지하당의 조직은 민주주의적으로 선거를 통하여 조직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한 중앙집권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 노동당이나 구소련과 중국 등 공산국가들의 공산당 조직원칙인 ‘민주주의중앙집권제’와 달랐습니다. 결국 남한의 지하당 조직 내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어 간부의 임명과 파견 등 모든 인사 및 조직통제를 중앙이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대남통전부는 “남한의 민주기지가 든든하자면 창설된 지하당조직들이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의 정예간부들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하고 조직원 간 상호 노출을 피하고 간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상부선과 하부선은 단선으로 연계되며 횡적으로의 연계나 복수의 연계는 피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지하당 조직의 중요한 단위에는 사고에 대비하여 정(正) 조직 외에도 보조조직을 은밀히 두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지하당의 비밀엄수의 조직원칙은 지하당의 기본임무가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혁명역량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것을 부단히 축적하고 장성시킴으로써 혁명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남한의 지하당조직을 관할하는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을 현지지도하여 남한 내 지

하당 구축을 독려하였습니다. 1964년 4월 대남사업총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모택동 전술을 이용한,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강력한 지하망 조직 및 활동을 강화하라”고 지시했고 1965년 10월에 진행된 노동당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지금까지 수행해 온 대남공작은 너무나 소극적이었으므로 하등의 성과가 없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에 진행된 노동당 제5차대회 보고문에서 “남조선혁명은 어디까지나 남조선인민들 자체가 주동이 되어 수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노동당 대남연락부를 현지지도하면서 “남조선 혁명의 지도핵심이란 사상적으로 완전히 준비된 간부, 즉 혁명과 자기생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며 독자적으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전략전술을 수립할 수 있으며 대중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중국 주석 모택동이 “중국을 해방하였을 때 참다운 지도핵심이 100명에 불과하였다”고 말했다면서 "남한에 지도핵심이 50명만 있으면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김정일이 대남공작부분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면서 남한에 이미 깊숙이 뿌리박고 있던 고정간첩보다 북한에서 정예의 지도핵심을 육성하여 남한에 침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대남연락부에서 양성한 간첩들을 북한에서는 공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에 입각해 남한에서 활동할 수 있는 준비로 한국말을 배우고,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훈련들을 받았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처음에는 해주와 개성, 강원도의 온정과 평강 등 휴전선을 넘나드는 육상침투 루트를 이용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원산, 해주, 남포, 청진 등 해안선 지역에 위치한 연락소 공작원들을 해상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선으로 위장한 단순한 목선으로 침투하였으나 차츰 공작선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침투장비를 현대화하면서 크기가 다양한 공작선들이 이용되었습니다.

당시 김책공업종합대학 선박해양공학부 졸업생들이 공작선 성능개선을 위해 각 연락소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저의 외삼촌도 김책공업종합대학 선박해양공학부를 졸업하고 원산연락소에 배치받아 공작선 성능개선을 위한 기술자로 소환되었는데 직급은 노동당 대외연락부 지도원이었습니다. 공작선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대남연락부는 대형 공작선을 도입하여 공해를 크게 우회하여 침투하는 전술과 남한 해군의 해안탐지기를 피할 수 있는 반잠수정도 개발하여 그때부터 북한의 대남침투는 활발해지게 되었습니다. 대남연락부는 서해안에는 남포연락소와 해주연락소, 동해안에는 청진연락소와 원산연락소를 운영하였고 육상침투 기지로는 서부전선 침투를 담당하는 개성연락소와 중부전선 침투를 담당하는 사리원연락소를 운영하였습니다.

현재 북한의 대남공작을 위한 조직으로는 대외연락부,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의 정찰국, 국가안전보위부 등이 존재하며 이 부서들에 대한 총괄은 대남통전부가 맡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김씨왕조 독재국가인 북한의 체제하에 두려는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은 남한을 공산적화시키려는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통일전략이며 김일성 시대에 이어 여전히 오늘날 김정은 시대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방 후 남한에 존재했던 남로당의 뒤를 이어 북한의 대남통일전략과 민주기지론에 의해 남한에 세워졌던 통일혁명당, 민족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반미구국통일전선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허물고 전체 민족을 김씨 일가의 노예로 만들려는 반민족적, 반인륜적 반국가적 조직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단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여전히 대남통일전략으로 대한민국에서 불순한 반국가단체들과 친북용공분자들로 선친들이 내세웠던 소위 ‘민주기지’건설을 획책하지만 역사는 독재자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