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시간에 김정일의 지시로 양강도 혜산시 검산동에 지은 1호특별역전인 왕덕역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김정일은 1980년대 중반에 백두혈통을 내세워 권력승계의 정당성을 북한주민들에게 세뇌시키기 위하여 가짜백두밀영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무더운 여름에 휴가를 즐기기 위해 삼지연특각들을 지어놓았고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경을 가까이한 삼지연철도노선이었습니다. 북중국경에서 벗어난 혜산시 검산동에 왕덕역을 짓고 이곳에서 보천군을 지나 삼지연으로 가는 특별도로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왕덕도로입니다. 오늘은 왕덕도로건설에 동원되었던 양강도 보천군과 혜산시 주민들의 고통스러웠던 강제노역과 그 이후에 왕덕도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타고 다니던 1호열차가 지나갈 때면 전국의 열차들이 오랜 시간 연착되던 사실들이 기억날 것입니다. 이 특별열차가 평양역을 떠나 길주역을 거쳐 혜산역에 들어가기 한 정거장 전인 위연역에 도착하면 이미 대기하던 위연-삼지연 내연열차를 타고 보천을 거쳐 삼지연으로 가게 됩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협궤철도노선인 삼지연노선은 중국국경지역 마을들이 바라보일 정도로 압록강을 끼고 있습니다.
백두산답사생들이나 일반주민들은 삼지연열차노선을 타고 가면서 바라보이는 중국국경마을을 보면서 난생처음으로 바라보는 중국인의 생활모습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김정일에게는 신변위협이라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무장한 호위사령부 군인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특별열차를 방탄열차로 개조한 김정일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막대한 돈을 들여 자기들만이 따로 다닐 수 있는 특별역인 왕덕역과 특별도로인 왕덕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김정일이 중국국경에 가까운 것이 두려워 양강도 혜산시 강구동에 있던 강구특각에 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는 지금 이곳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양강도작가동맹 작가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1970년대 말에 김정일은 고산지대가 건강장수의 최적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양강도 일대와 묘향산, 연풍호 등지에 특각들을 건설하도록 하였지만 국경지역에 위치했던 강구특각은 끝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북중국경을 두려워했던 김정일은 특별열차를 타고 거의 모든 역전들에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였고 특별열차도 여러 편으로 편성하여 어느 열차편이 김정일이 탄 특별전용열차인지 모르게 하였습니다.
김정일이 탄 특별열차가 통과되기 전에는 최소한 10시간, 많기는 이틀정도 일반열차들이 연착되어 역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사복을 입은 보위원들이 밤을 새면서 사람들을 감시하였고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잡아다가 조사한다는 구실로 특별열차가 통과할 때까지 감금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김정일이 특별열차로 삼지연으로 이동하면 그전부터 통과되는 시간까지 함경남북도와 양강도의 모든 철도역들에서는 일반열차운행이 중단되곤 하였던 것입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집으로 가려고 평양역에 나왔다가 특별열차가 출발한다며 우리가 탈 열차가 연착되어 방학을 이틀이나 역전에서 보내야 했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정일이 무더운 평양의 여름을 피해 백두산과 삼지연특각에 가느라 전국의 열차를 다 세워놓았지만 누구하나 불만을 겉으로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김정일이 탄 특별열차가 평양에서 양강도 혜산시 위연역에 당도하기 며칠 전부터 그 지역은 호위국 군인들과 보위원들로 뒤덮였고 도착 전날부터는 역전 근처에 개미 한 마리 얼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위연역까지 내려와도 중국국경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 왕덕역을 건설하도록 하였고 그 이후로는 열차가 위연역까지 내려오지 않고 왕덕역에서 삼지연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덕역은 양강도 혜산시 검산동과 보천군 의화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검산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에 양쪽으로 계곡이 있는 곳에 왕덕역이 건설되었습니다. 해발고가 천m가 넘는 산으로 둘러막힌 왕덕역은 유사시에 비행기 폭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짜기에 감춰져 있습니다.
왕덕역 공사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역에 자리 잡기까지 3번에 걸쳐 위치를 옮겼습니다. 1985년에 시작된 왕덕역사 건물은 양강도 도소재지인 혜산역전보다도 더 웅장하고 고급스런 건축자재를 사용하였지만 중국국경지역이 보인다는 이유로 파괴해버렸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왕덕1호역과 왕덕1호도로를 김일성의 생일 80돌까지 완성할 데 대한 과제가 떨어졌고 군인 건설자들과 북한주민들이 휴식일도 없이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혜산시와 보천군주민들은 바쁜 농사철에도 불려나와 공사에 동원되었고 결국 1992년에 왕덕역 건설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1992년부터 1994년 죽기 전까지 2년 정도 왕덕역과 왕덕도로를 다녔지만 김정일은 해마다 한두 차례씩, 20년 동안이나 이용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년 365일 동안 포와 장갑차를 비롯한 중무장을 한 호위사령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왕덕도로관리를 위하여 수십 명의 도로관리원들이 상주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배급을 정상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왕덕역이 완공된 이후인 199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자 한국정부와 민간단체들에서 인도주의적인 대북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감자농사의 현대화를 위해 기술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북한정권은 검산역에서 왕덕역으로 가기 전 2km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혜산감자조직배양공장을 지어놓고 이 공장을 성분토대가 좋은 사람들로 꾸렸습니다. 남한의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이 199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 동안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지어준 씨감자생산공장을 김정일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2001년과 2002년에 김정일이 북한의 여러 감자조직배양공장을 현지지도 하였지만 북한정권은 ‘김덕현동무가 일하는 무비루스감자조직배양온실’ 아니면 외국에서 기술실습을 진행하여 ‘김춘언 소장이 일하는 감자연구소에서 조직배양에 의한 무(無)비루스 감자종자 생산방법과 바이러스 검사방법’을 완성했다고 보도하는데 그쳤습니다. 한국의 원조와 기술지원으로, 일본 등에 기술자를 파견한 사실과 왕덕역 가까이에 이런 씨감자조직배양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숨기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왕덕역이 건설되면서 왕덕역에서 보천군을 지나 삼지연으로 가는 1호도로 건설에 많은 주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부역은 일요일에도 계속되곤 하였습니다. 혜산시 검산동에서 보천군 의화리를 거쳐 보천읍까지의 구간은 혜산시 각공장기업소들과 인민반 세대들이 맡았고 보천읍에서 삼지연까지의 북쪽도로는 보천군이 담당하였습니다. 노력동원 외에도 자갈과제, 석비례과제들이 제기되면 기관기업소와 인민반에서는 돈으로 해결한다면서 세부담으로 돈을 걷어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김정일이 다니게 되는 1호도로이기에 누구도 겉으로 불만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도로구간을 떼어 맡기면 화물자동차를 보유한 도인민위원회나 연료상사 등 힘있는 단위들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그 외 거의 모든 기관들과 인민반들은 맡은 과제를 모두 인력으로만 해결해야 했습니다.
왕덕역과 왕덕도로가 완공된 후에도 김정일이 삼지연특각에 올때면 보통 10일 전부터 지역주민들은 꾸리기작업(환경미화)에 동원됩니다. 작업에 동원되는 인원은 조직별로 이동하여야 하고 호위국 군인들의 검열을 받아야만 작업장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도 자주 동원되어 왕덕역과 그 주변, 그리고 왕덕1호도로를 가보았는데 역사 주변에는 곰과 토끼모형의 큰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고 외국에서 들여온 다양한 색깔의 외장재(페인트)로 장식하여 마치나 동화세계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김정일은 ‘용천폭발사고’가 났던 그 다음해인 2005년에 ‘왕덕도로’ 주변에 있던 자동보총생산공장인 ‘삼지연 정밀기계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조치를 취하였고 그 이후에는 보천읍에 있는 김일성동상보위를 위한 고사총중대를 해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당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도 김정일이 총탄을 생산하는 공장과 고사총부대마저 자신의 신변보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김정은이 탄 특별열차가 지나갈 때면 북한주민들은 역전에서 연착된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북한도 언젠가는 일반주민들도 1호역과 1호도로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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