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노동교화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처음 체포될 때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체포되는 순간에 보안원이나 검사 등 법관들이 피의자에게 반드시 고지하는 내용, ‘미란다 원칙’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란다 원칙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찰이나 검사가 용의자를 체포하는 순간에 체포하게 되는 이유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미란다 원칙은 체포하면서 경찰이나 검사가 체포되는 당사자에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질문을 받을 때 변호인에게 대신 발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할 경우엔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것입니다. 이 권리가 있음을 인지했습니까?”라고 말하도록 정한 규정입니다.
이 원칙은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의심되는 용의자라 할지라도 재판 받기 전까지는 피의자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으로써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절차죠.
미란다 원칙은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 주의 피닉스 시에서, 18세의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던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란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당시 경찰에 연행된 미란다는 조사실에서 2명의 경찰관에게 피의자 조사를 받았고 2시간 만에 자백이 적힌 진술서에 서명을 하여 결국 1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진술서에는 “자신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이해했으며 자기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진술한 자백이다” 이라는 문장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조사를 했던 경찰관들은 그것을 본인이 진술한 구술자백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상소법원에서도 미란다의 자백조서 내용을 토대로 납치와 강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각각 징역 20년과 30년이 선고된 원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여 판결하였고 미란다는 교도소에 갈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는 “조사관들의 증언과 피고인의 법정진술을 토대로 볼 때 미란다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했으며 진술거부권도 여러 가지 면에서 효과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는 점, 이러한 피의자에게 필요한 법적 권리 등을 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의자 심문 조서상의 자백은 증거로 쓰일 수가 없다”며 앞선 판결을 파기하였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조서 상에 피의자가 그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기재한 것만으로는 피의자가 진짜로 그의 헌법상 권리를 심사숙고했다고 볼 수 없다고 간주했고 이때부터 미란다 원칙이 처음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는 미란다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범죄 용의자를 체포하는 현장에서 ‘반드시 피의자에게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경찰심문에 대한 자백이 법정에서 그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된다는 사실’,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지 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체포하여 이루어진 자백은 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른바 ‘미란다 원칙’이 성립되면서 경찰이나 검사들이 강제로 자백을 받아낼 수 없게 되었고 체포단계에서부터 피의자의 인권이 철저히 보장되게 되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나 미국 등 선진국은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죄를 범했다고 인정되는 용의자라 할지라도 피의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체포를 하는 현장에서 미란다 원칙이 철저히 행사되고 있지만 북한은 과연 어떤가요?
북한에서도 형사범은 인민보안성 보안원에 의해 체포되어 죄질의 따라 재판을 거쳐 노동교화소로 보내지게 되는데, 심층면접자들을 통해 분석한데 의하면 체포과정에서 미란다 원칙은 고사하고 영장 제시와 같은 행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탈북민 심층면접 대상자들은 체포 당시에 체포 경위와 수용 절차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재판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사실 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층면접에 참가한 탈북민 중 노동교화소 수용 절차와 법적 근거에 대한 질문에 ‘형법’이라고 답을 한 면접자는 한 명도 없었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지시와 교시, 말씀이라고 응답한 면접자가 전체의 60%에 달했으며 ‘당의 방침’이라고 말한 탈북민은 약 20%, 나머지는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북한에서는 체포, 구류, 조사, 노동교화소 수감 등의 과정에서 억울하게 죄 아닌 ‘죄’로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국가는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던 고난의 행군은 국가가 정치를 잘못하여 일어난 대참사였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김정일에게 있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1980년대 김정일이 업적 쌓기 일환으로 평양시에 문수거리와 광복거리, 통일거리 등 대공사를 벌였고 과학발전보다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바람에 국고를 마구 탕진했고 핵무기 개발을 한답시고 국방비에도 재원을 탕진하면서 농업, 경공업, 식품공업 등 인민생활과 관련된 분야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습니다.
거기에 1988년 대한민국에서 88 서울올림픽이 진행되면서 전 세계 체육인들과 국가 관료들, 관광객들이 북한보다 더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몰려들자 1989년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한다며 여기에도 막대한 국가자금을 탕진하는 바람에 북한의 경제는 더 이상 소생하지 못할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면서 북한에 대한 지원이 차단되고 흉년이 들면서 배급이 끊기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주민들 간에는 목숨을 건 탈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중 국경 지역들에서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밀수를 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북한의 사법당국은 힘없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구속, 처벌하였습니다. 당시 밀수를 하다가 체포되어 2007년 2월부터 2016년 4월까지 9년 동안 노동교화소에 수용되었던 한 탈북 여성은 심층조사에서 억울함을 토로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미란다 원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증언을 시작한 그 탈북 여성은 체포 될 때 심한 욕을 하면서 “수갑을 채우던 보안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하였습니다.
국가가 배급체계 파괴를 책임지고 주민들에게 잘못을 빌고 대책을 마련할 대신에 오히려 밀수를 해서라도 살려고 한 것에 대해 체포하면서도 미란다 원칙 대신 심한 욕을 퍼붓던 북한의 법관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더 이상 북한주민들을 상대로 추노와 같은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노는 달아나는 노예들을 잡으러 다니던 노예의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김정은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구호가 허울처럼 되지 않으려면 피의자들을 체포하면서 대한민국처럼 미란다 원칙을 제시하도록 사법당국에 지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