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대남통일전략과 동백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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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한반도를 김씨왕조의 독재체제로 만들려는 야망으로 6·25남침전쟁을 일으켜 민족의 대(大)재난을 불러왔던 김일성은 1960년대에도 해외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과 연계된 당시의 많은 사건들 중에 오늘은 1967년에 시작되어 1969년에 종결되었던 ‘동백림사건’, 일명 ‘동베를린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대 북한당국은 남조선혁명론의 일환으로 한국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저들의 대남통일전략에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동백림사건이 발생한 독일은 당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었고 1960년대 중반에, 당시 서독에 거주하였던 한국 교민들 중 일부가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 일부 광부들이 한국대사관에 사전 연락이나 신고 없이 동베를린에 왕래한 사실이 밝혀져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4월에는 조선일보 특파원 이기양 실종사건이 일어났고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한 사람인 임석진이 자수하면서 한국 정보기관이 동백림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기양 특파원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1967년 4월 14일 체코에 입국한 이후 실종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박신자 선수의 맹활약으로 소련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해 교민사회를 들었다 놓았지만 이기양 특파원의 실종은 더 크게 소문났습니다. 독일 교민사회에서는 이 특파원 실종사건에 대해 자진 월북, 납치 혹은 살해 등 각종 소문이 떠돌았고 조선일보 측은 사안이 명확하게 판단되기 전까지 보도를 자제하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체스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는 국제경기를 취재하기 위한 입국비자를 한국에서 받을 수 없었던 이기양은 한 여행사로부터 체코의 프라하 공항에서 직접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체코에 입국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독일 튀빙겐 대학교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기양은 한국일보 기자로 있다가 조선일보 유럽특파원으로 이직한 상태였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체코에서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체코에 갔다가 실종된 것이죠.

이기양을 동독에 있는 북한대사관에 소개한 인물이 바로 임석진이라는 인물입니다. 당시 서독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 대학생들은 동독에 가면 전공 관련 도서들이 저렴하다는 소리를 듣고 동독으로 갔다가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게 되고 결국 북한 대남통일전선부에 이용당하게 되는데 그때 동백림사건 조사 시작에 일조했던 임석진은 한국 유학생 20여 명을 북한대사관에 연결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임석진은 1960년에 처음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여 어릴 적부터 친형처럼 따르던 윤기봉의 행방을 북한 대사 이원찬에게 부탁했습니다. 한국 연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윤기봉을 임석진은 어린 시절 친형처럼 따랐고 윤기봉의 어머니는 임석진을 수양아들처럼 대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남조선 노동당 핵심당원이었던 윤기봉은 6·25남침전쟁 발발 1달 후인 1950년 7월에, 임석진이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강제입대 될 뻔 했을 때 남로당 핵심당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그의 군대 징집을 막아주었고 임석진은 그 일로 하여 윤기봉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북한 대사 이원찬은 임석진에게 윤기봉의 가족이 평양에서 지내고 있음을 확인해주면서 평양방문을 권유했고 임석진은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가 열리고 있던 1961년 9월 초에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임석진에게 지속적으로 조선로동당 입당을 권했고 그는 고민 끝에 1963년에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서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습니다. 임석진은 그 다음해인 1964년에 남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북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기에 1966년에는 평양에 가서 대남사업총국장인 이효순을 만났고 제3국에 머무르면서 대남공작을 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북한의 대남통전부의 보복이 두려워 한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자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5월 15일 이기양 특파원 실종사건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이기양을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에 소개했던 임석진은 이 실종사건으로 자신이 대남통전부의 지시를 받고 공작사업을 했던 것이 드러나고 특히 조선노동당원으로 입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한국은행 주재원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와 친분관계가 있었던 임석진은 그를 통해 자수를 하려고 했고 1967년 5월 17일 한국정부 주요인사와의 접촉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의 노력으로 임석진은 1967년 5월 19일에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고 서독 등 유럽에서 생활하는 유학생들이 북한 대남통전부의 대남전략에 이용되었다가 겪는 정신적·경제적 어려움과 자신이 대남공작에 이용되었던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석진에게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으니 중앙정보부의 수사에 협조하라”며 진술내용을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했고 이때부터 동백림사건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국내에 거주하는 관련자들이 연행되었고 1967년 6월 7일부터는 서독과 프랑스 등 해외에 거주하는 동백림사건 혐의자들을 국내로 연행하기 위한 일명 ‘GK공작’이라고 불리는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독주재 한국대사관 대사는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최덕신입니다. 김일성이 소년기에 화성의숙에 다닐 때 화성의숙 숙장이었던 최동호 선생의 아들인 최덕신은 1914년 9월 17일에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외교부장관을 거쳐 서독대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이죠. 그는 동백림사건으로 서독주재 한국대사직에서 해임되면서 한국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86년에는 72세의 나이에 북한으로 망명하여 조선천도교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조선골프회장 등 여러 직책을 맡았지만 3년 뒤인 1989년에 사망했습니다.

최덕신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백림사건 당시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서독에 거주하는 관련자들을 연행하는데 자신은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해임에 이러한 그의 태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1967년 6월 20일부터 서독과 프랑스 등 해외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혐의대상자는 48명이었는데 이들을 A급, B급, C급 3개의 급으로 나누어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A급은 윤이상과 이응로 같은 ‘거물급’이며 B급은 학위를 마친 후 현지대학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 교수들이었고 C급은 유학생과 서독에서 일하는 대한민국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었습니다.

첫 연행 작전에서 국내 39명이 체포된 데 이어 해외에 30명, 모두 69명이 연행되었습니다. 해외 연행자 30명 중에는 서독 16명, 프랑스 8명, 미국 3명, 영국 2명, 오스트리아 1명이 연행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이 연행되어 그 수는 2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렇듯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에 이용되어 자기의 인생을 망치고 가족들에게도 피해를 준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반도를 김씨왕조의 독재사슬에 얽매어 놓고 저들이 노예로 만들려는 야망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주체혁명위업 완성’이라는 구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