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날조된 보천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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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6권 17장 ‘조선은 살아있다’ 1절과 2절에 나오는 ‘보천보의 불길’에 기록된 내용들이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천보 전투를 북한 외부에서 보천보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장한 두 적아간의 전투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조국광복회 회원 수십 명이 작은 농촌마을에 불과한 양강도 보천군(당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보천보 사건에 동참한 조국광복회원으로는 박달과 박금철이 동원한 조선인들로 67명 정도였다는 것이 당시 증언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이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나에게는 정신적 체험이나 추억거리들이 적지 않다”며 “보천보 전투는 한마디로 생이별을 당한 어머니와 그 자식들의 상봉과 같은 사변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1982년부터 약 20년 동안 중국 동북3성 항일투쟁 사적지 전역을 누비며 당시 생존자들과 관련자 수백여 명을 직접 만나 취재했던 조선족 출신 재미교포 작가 유순호는 “김일성의 역사왜곡 중에서 가장 큰 오류는 보천보 전투였다”고 강조했습니다.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인물이 김일성이 아닌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참모장, 중국인 왕작주였고 전투 참가자들도 중국인 대원들이 더 많았다는 것도 당시 증언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와 있는 보천보 전투의 약도를 보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농사시험장, 산림보호구, 소방회관, 우편국 등 습격장소들이 빨간색의 이동경로와 함께 그려져 있어 마치 큰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수십 명의 무장인원이 일방적으로 습격한 방화사건에 불과합니다.

김일성도 이 보천보 사건에 대해 “보천보 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었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 전투였다”라며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면서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입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각 밤 10시 자신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당시 전화선 절단조 임무를 맡았던 오중흡이 전화선을 자르고 나서 성공을 알리는 신호로 발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재소에 있는 적들을 통쾌하게 소멸했다”며 보천보 사건을 큰 전투를 치른 것처럼 회고하였지만 사실은 당시 야밤에 당직경관이었던 일본인 순사 야우치가 오중흡의 신호총 소리에 몸을 피했으며, 총소리에 놀라 갈팡질팡하던 야우치의 아내 등에 업혔던 두 살배기 딸 미꼬가 유탄에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전화선을 절단하고 마을을 습격한 지 1시간만인 밤 11시에 철수 나팔소리와 함께 약탈품을 둘러메고 철수한 대원들을 따라 국내 조직 민간인들은 압록강을 건너 23도구까지 약탈품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김일성이 했다는 군중연설도 없었고 사망자는 두 살배기 어린 일본인 여아와 35살의 일본요리집 주인 등 민간인 두 명이었습니다. 식량이 다 떨어지고 생활용품도 부족했던 동북항일연군이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야밤에 습격해 약탈을 목적으로 기습한 사건을 전투로 둔갑시킨 보천보 사건, 이 사건은 여전히 북한주민들에게는 김일성의 큰 업적으로 세뇌 선전되고 있습니다.

회고록 5권 14장 ‘장백사람들’ 1절 ‘서간도’에는 “김일성 장군이 축지법을 써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는 말로 마치 자신이 당시 유명인이었던 것처럼 설명했지만 이 전설은 김일성의 10대시절인 1920년대부터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내려오던 진짜 김일성장군에 대한 전설이었습니다. 본명이 김성주인 가짜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20년대 맹활약을 했던 진짜 김일성의 업적을 가로채서 자기와 연유된 것처럼 꾸며 놓았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회고록을 읽으면서 김일성이 부대 이름을 ‘조선인민혁명군’ 그리고 자신을 그 사령관으로 자칭하면서도 그 사령부의 구성이라든지, 부대편성 조직도나 총병력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셨으리라 봅니다.

김일성의 출생부터 1937년 11월까지의 날조된 역사를 담은 회고록 6권까지의 내용에는 더 많은 거짓 역사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이미 김일성이 몸소 작성한 ‘포고’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거리에 붙이고 선전물을 뿌리면서 연설했다는 내용도 있지도 않은 거짓말이 더해져 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보천보전투의 참패를 만회하려고 추격해온 일본군과 경찰을 구시산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 모조리 소탕하였다는 ‘호박대가리 전설’은 정말 있지도 않은 날조라는 것입니다. 당시 추격한 일본군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와 혜산진 수비대 병력 230명은 1937년 6월 30일 간삼봉에서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벌렸는데 총지휘는 김일성이 아닌 동북항일연군 2사 사장 조국안과 4사 최현 등의 연합 지휘 형태였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일본군 1500여 명을 죽이고 엄청난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신문에는 일본군 전사자 5명, 동북항일연군은 전사자가 60여 명으로 보도되었습니다.

황당하게 날조된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너무도 상반되기에 이같은 역사왜곡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북한 노동당은 전 세계 그 어느 나라나 다 공개하는 인터넷까지 폐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