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이 생존했을 때 그가 “남조선을 해방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말한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지난 1950년에 김일성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일으켰던 6·25남침전쟁과 1968년 푸에블로호사건, 1976년 판문점도끼사건, 1980년 광주민주학생사건 등은 김일성이 소위 남조선 해방을 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루지 못했다며 강연회들에서 언급했던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들 외에, 김일성이 1995년에 연방정부를 수립해 남한을 무너뜨리고 김씨 왕조 독재사슬에 온 겨레를 빠뜨리려 했던 ‘특대형 간첩사건’에 대해서 여러분은 잘 알지 못하리라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들이 남한 내 노동당 지부들을 설립해 1995년을 기점으로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건, 이른바 북한 거물급 간첩인 이선실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2년 10월 6일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불리는 이선실 간첩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표문을 공개하였습니다.
“북한의 당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권력서열 22위인 71살의 이선실 여인이 20여 년간 암약하면서 그 밑에 직파간첩 10여 명으로 공작 지도부를 구축하고 지하노동당을 결성했다. 조선노동당은 합법조직과 연계해서 연공정부를 수립하고 1995년 한반도의 공산화를 이룩한다는 전략아래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대남공작을 수행했음이 확인됐다. 이 사건과 관련된 전민중당 대표 김락중과 정책위원장 장기표 등 400여 명 중 90여 명을 검거했고 60여 명을 구속했고 3백여 명을 추적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번 간첩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바로 알고 이 땅에 이런 불순분자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수상한 자들을 찾아서 신고하도록 해야 하겠다”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는 또한 서울, 인천 등 24개 주요 도시의 46개 기업과 단체 등 300여 명의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북한 노동당과 남한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 온 비합법 지하조직에 대해서도 공개했습니다.
이선실에게 포섭돼 북한에서 교육 받은 황인오는 1991년 7월에 강원도 삼척의 모 여관에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으며 산하에 강원도당, 충북도당, 충남도당 및 편집국을 두었습니다. 근 3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북한의 거물간첩으로 활동한 이선실은 1917년 제주 서귀포에서 출생했습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이화선이었고 가난한 여염집 소녀였습니다. 이선실은 당시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던 김한정, 장종식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 설립된 ‘신유의숙’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선실은 자신이 월북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이복동생 이창하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선실의 이복동생 이창하는 1948년에 제주에서 발발한 4·3사건으로 사망하고 이사건 직후 정부에 환멸을 느낀 이선실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것이죠. 해방 후 남한에도 노동당이 창당되고 전국 각지에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선실은 남로당의 전위조직인 여맹에 망라되어 부산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남침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남편과 자녀들을 남겨두고 월북했습니다.
월북 후 그는 사상 학습기관인 ‘금강정치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금강정치학원은 남한에 파견할 지하당 간부들과 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창설한 정치군사 간부훈련소로써, 황해북도 서흥군에 위치한 학원으로 교육생들은 남한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선실은 금강정치학원을 높은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노동당 경공업위원회 과장, 평양시 여맹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에서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남조선혁명’이라는 목적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46세가 되던 1963년에 이선실은 김일성에게 공작원이 되어 조국통일위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제의서를 올렸고 김일성의 지시로 당시 695군부대로 불리던 공작원 양성기관에서 남파간첩 교육을 받은 후 1966년에 남파되었습니다.
1966년에 해상으로 침투하여 부산항 인근 바다로 침투한 이선실은 1973년까지 7년간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대남통전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다시 북한으로 귀환하여 새로운 지령을 받게 됩니다. 대남통전부에서는 이선실의 신분을 새롭게 세탁하여 다시 남한에 파견하고 지하당을 조직하려고 꾀했던 것입니다. 이선실의 신분세탁 대상은 일본에서 북한으로 귀국한 재일교포 신순녀였습니다. 대남통전부는 이선실과 비슷한 나이의 북송재일교포인 신순녀를 이선실과 만나게 하였고 이선실의 가짜 신순녀 조작을 위한 기억을 전달받도록 했습니다.
이선실은 귀국동포 신순녀로부터 그의 가족 내력과 그녀가 살아온 경력 등을 모두 전해 들으면서 완벽한 가짜 신순녀로 위장한 뒤 1974년에 일본에 가서 신순녀 가족을 찾아가 자신이 진짜 신순녀인 것처럼 연기를 하였습니다. 가족마저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한 이선실은 일본 현지 가족들의 보증을 받아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 확인증을 받고 남파를 목적으로 일본 현지에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진짜 신순녀임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 재일교포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온 이선실은 전라북도 전주에 살고 있는 신순녀의 언니 신양근을 찾아가 진짜 신순녀 역을 하게 되고 여기서도 가족들은 이선실을 진짜 신순녀로 믿게 됩니다.
이렇게 ‘재일한국인증’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이선실은 1979년에는 김정일의 지시로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되었고 노동당 6차 당대회를 맞으면서 노동당 정치국후보위원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신분을 완전히 세탁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이선실은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적극적으로 간첩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서울시의 국회가 있는 여의도 인근, 대방동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황인오와 손병선 등을 포섭해 자금을 지원해가며 남로당 지하조직 확장을 꾀했습니다. 이선실은 우선 민중당을 통해 정계에 진입하려고 당시 본인의 분신인 ‘신순녀’와 북한에서 쓰던 ‘이선실’이란 이름 대신 ‘이선화’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선실은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으로 복귀해 노동당 대남통전부 요직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공작원들을 지도할 목적으로 1990년 5월에 북한으로 월북하였습니다. 당시 이선실을 월북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던 남파공작원 김동식은 1995년에 다시 남파되어 남한 내 고정간첩망 점검과 국내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망을 새로 구축하려 했으나 정체가 드러나 체포되었고 그를 통해 이선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1990년 10월 17일에 30여 년간의 공작원 생활을 마치고 강화도를 거쳐 월북한 이선실은 북한에서 대남통전부에서 근무하면서 여생을 잘 보내는 듯 했으나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김씨왕조 북한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비난의 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심화조 사건으로 2만 5천여 명이 처형되거나 숙청되었는데 이선실도 미제의 고정간첩이라는 누명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이렇듯 김씨 왕조 독재집단은 저들에게 필요할 때에는 써먹다가도 더 이상 필요한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생각되면 마구 처형하는 반인륜적인 집단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