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주체사상파의 등장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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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1970년대 당의 유일사상체계10대원칙이 제시되면서 북한 사회전반에 걸쳐 보급된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당시 북한의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대학가들에 전파한 사람들을 일컬어 주체사상파, 약칭으로 주사파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한국에서 주체사상파가 등장한 배경과 활동에 미친 북한당국의 영향과 주사파의 몰락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면서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이했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북한의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에 대한 담론들이 한국의 대학가들에 유포되면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주사파가 사회운동의 한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도 ‘민주화운동’의 한 고리로 전개되기 시작한 주체사상파의 활동을 지원하여 주체사상의 이념을 보급하고 핵심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벌렸습니다.

1980년대 주체사상을 북한에서 처음으로 유입한 인물이 한국 내 운동권 학생들의 인기도서였던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입니다.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난 그는 198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에 함께 동숙하던 노동운동가 심진구의 영향과 북한의 대남방송, 일본 조총련 서적 등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과 주체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1986년에 도서 ‘강철서신’을 집필하여 운동권 학생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

김영환의 저서 ‘강철서신’의 목차만 봐도 그 책 내용이 얼마나 한국청년대학생들과 한국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1장 혁명전통과 민중적 품성, 제2장 노동해방운동의 힘찬 전진을 위해, 여기서 쓰인 혁명전통과 노동해방운동 등의 표현은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이죠. 그리고 제3장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의 극복, 제4장 대중조직과 전위조직, 여기서 개인주의나 대중조직 혹은 전위조직 이란 말은 한국에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 북한에서 흔히 보는 표현입니다. 또 제8장 활동가의 일상실천론, 제9장 실제적인 선전활동, 제10장 설득력을 지닌 말부림은 북한노동당의 선전선동부의 지침 같은 내용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강철서신 내용 중에는 함께 동숙하던 노동운동가 심진구가 작성했던 ‘한국사회 선진노동자의 임무’를 베껴 쓴 것으로 알려져 주체사상파 대부로 알려진 김영환과 심진구는 훗날 친구의 정이 멀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에 군대를 제대한 후에 독학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탐독한 심진구는 1985년에 서울특별시 구로동에 위치한 구로공단의 삼립식품공장에 취직하여 ‘구로독산지역 선진적 노동자회’ 모임을 만들고 노동운동의 경험활동 등을 정리하여 ‘한국사회 선진노동자의 임무’라는 내용의 문건을 저술했는데, 김영환이 이를 참고하여 강철서신에 활용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김영환은 1986년 처음으로 한국에 최초의 자생적 주체사상 학생조직인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여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와 한국 경찰의 1급 추적대상으로 지목되게 되었고 그해 11월에 부산에서 검거되었습니다.

그는 1988년에 형집행정지로 출소된 이후 그 이듬해에 지하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해 활동하였고 남파간첩인 윤택림을 만나 현지에서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이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국으로 평양에 가서 정식 노동당 정당원으로 입당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 가서 받은 그의 대호는 ‘관악산1호’입니다. 관악산은 주체사상파 대부 김영환의 모교인 서울대학교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 산(山) 이름입니다. 밀입국하여 김일성을 만난 김영환은 근 17일 동안 북한 대남통전부 기획에 따라 주체사상에 대한 이론을 습득하고 공작금 20만 달러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민족민주혁명당’을 결성하였습니다.

1980년대 중엽 이후로 시작된 한국에서의 주체사상보급과 주사파 활동은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되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에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하여 70년 동안 소련공산당이 유일정당으로 존재하던 구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되고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붕괴되면서 그 충격은 고스란히 한국 내 주체사상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1년에 밀입국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과 잡지 ‘말’의 기자 조유식의 전향 반성문을 보면 그들의 당시 변화되던 심리과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영환과 함께 밀입국하였던 조유식은 황해남도 해주의 한 공장이 폐허가 된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반성문에서 “북한에 대한 환상은 북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깨져 나갔다. 1991년 5월 16일 밤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해주에 도착한 뒤 초대소로 이동할 때 창밖의 농촌지대를 지켜보다 말할 수 없이 남루한 3층 건물 한 채를 봤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모란초대소에서 북한 공작원이 바로 전년도 5월 남한에서 운동권 사람들이 연이어 분신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인 얘기를 하면서 “그 투쟁은 운동권에서 순번을 정해놓고 대중운동을 격발시키기 위해 사용한 전술이죠?”라고 물었을 때 참으로 섬뜩했다며 주체사상 이념 같은 북한의 선전에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을 다짐했고 김정일 정권은 하루라도 빨리 무너져야 북한주민들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체사상파 대부 김영환도 고난의 행군시기 기아로 굶어죽는 북한주민들을 보면서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 창시에 이론적인 영향을 준 김일성종합대학 전 총장이자 조선노동당 황장엽 국제비서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것을 보면서 전향을 하였고 1998년 5월호 ‘말’지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김영환은 심지어 북한에 두 번이나 밀입국해서 김일성을 만났으며 김일성에게서 권총 두 자루와 공작금으로 40만 달러나 받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도 자기의 전향 반성문에서 주체사상에 잘못 매료되어 북한에 갔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남파공작원에 포섭돼 북과 연계를 맺고 1991년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돌아왔다. 한국으로 온 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었고 김씨 일가의 엄청난 특권과 사치생활, 주민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 자기들은 첩을 몇 명씩 두고 부도덕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체사상은 북한주민들에 대한 지배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고 인민의 자주성을 가장 심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북한동포 앞에 무릎 끓고 사죄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의 인권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주사파는 모래위에 세워진 누각마냥 허물어졌고 이젠 더 이상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