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살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실 그대로 접할 수 없는 여러분들에게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을 전해드리고 있는 탈북민 김주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에도 해방 후 김일성이 정치적인 적수로 여겨 중국공산당 출신이었던 김무정 장군을 숙청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김일성이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1941년에 러시아로 도망가서 소련군대에 입대하였던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김일성이 1941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소련 붉은군대 극동군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하였고 해방되어 한 달이 지난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부인 김정숙과 소련에서 태어난 당시 러시아 이름으로 김유라였던 4살배기 김정일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한 사실은 인민군 작전국장을 하였던 유성철의 고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성철은 김일성과 소련군대에 복무하였던 88저격여단 통역관이었고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하였지만 1958년 소련파 숙청시기 해임되자 1959년에 다시 소련에 들어갔던 인물입니다. 이렇듯 김일성은 반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소련으로 피해 달아났지만 무정 장군은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던 진짜배기 애국자였습니다.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복무한 사람들로는 최현, 안길, 최용건, 김책, 오진우, 리을설 등 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소련으로 달아나지 않고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중국공산당 산하 팔로군 출신들은 수적으로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북한의 모든 정치, 경제, 외교를 소련공산당이 좌지우지 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1945년 9월 19일에 귀국하여 한달도 되지 않았던 10월 14일 소련공산당은 북한의 최고영도자로 김일성을 소개하는 행사를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현재 개선공원에서 개최하도록 하였고 당시 34살의 김일성이 개선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무정 장군은 격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보다 나이도 8살이나 많았고 중국 팔로군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김무정 장군은 김일성이 소련공산당과 소련 붉은군대의 힘을 입어 북한의 영도자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서 격분해 하였던 사실은 10월 21일에 그가 한 행동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개선연설 행사를 마치고 일주일 후인 10월 21일 소련군은 북한에 여러 군사단체들을 통합하여 적위대를 조직하는 행사를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적위대 간부로 등용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습을 진행하도록 조직한 자리에서 무정 장군은 와이셔츠를 벗고 자기 몸에 난 총탄맞은 자리를 드러내 보이면서 ‘난 이처럼 총을 맞아가며 혁명을 했는데 왜 나에 대한 선전을 하지않고 어떤 사람만 선전하느냐’고 노골적인 불평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그가 말한 어떤 사람은 바로 김일성을 두고 한 소리였습니다. 그는 술만 마시면 “소련으로 도망갔던 사람이 소련공산당을 등에 업고 득세하였다”고 격노하면서 불평불만을 터뜨렸고 결국 김일성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김일성도 김무정에 대해 마구 대할 수 없어 당시에는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전에 평양시에 있었던 일본음식점들이 해방되어서도 남아있었는데 1945년 11월 어느 날 저녁에 일식집 다마야에서는 중국 팔로군출신 귀국환영모임이 있었습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무정 장군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들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산에서 풍산노숙하면서 싸웠던 그들이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에 의해 북한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군 출신들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억이 막혔던 것입니다. 그날 환영모임에 김일성도 참가하지 않았고 당시 불만이 많았던 김무정 장군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싸우면서 무정 장군 만세를 불렀던 팔로군 출신들로서 소련으로 도망쳤던 김일성보다 무정 장군을 더 존경하고 따르는 연안파출신 항일투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무정 장군이 소련군정으로 김일성에게 눌려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일성은 자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김무정장군을 그렇다고 마구 대할 수 없었습니다. 수백여 명의 중국공산당 소속 팔로군출신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무정 장군은 서북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제2비서로 추대되었고 제3차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와 제4차 분국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2비서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면서 당중앙위원회 간부부장을 맡으면서 당내 간부 등용을 도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군부에도 막강한 세력을 뻗쳤는데 1946년 2월에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 훈련대대가 창설되면서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인민군 창설 이후에는 제2지휘소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무정 장군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남로당 출신 고위간부였던 박병엽이었습니다. 그는 ‘무정 장군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면은 부족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권력욕은 있었으나 김일성보다 계책을 꾸미고 무자비한 숙청을 하는 그런 무자비한 인물은 못 된다는 표현이라고 보여집니다.
무정 장군에게 시련이 닥쳐온 것은 6.25 남침 전쟁시기였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락을 받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김무정 장군을 제2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용맹스런 무관기질과 중국 팔로군시절에 떨친 명성으로 그는 민족보위성 부상,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도 겸했으며 1950년 9월에는 평양지구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이끄는 제2군단이 1950년 11월에 낙동강지역에서 여러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자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7군단장으로 후방지역인 자강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강도 만포시 지역을 순찰하다가 팔로군 출신 병사가 부상당한 것을 목격하였고 군의관인 리청산이 바쁘다는 구실로 진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총으로 위협한다는 것이 그만 죽여버렸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1950년 12월 4일에 자강도 만포군 별오리에서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특별 전원회의에서 낙동강 패전책임과 명령 불복종, 군의관 사살 등의 죄명으로 무정 장군을 해임철직시켰습니다.
해임철직된 무정 장군은 195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더 심해지자 당시 중국지원군 사령관으로 북한에 나와있던 팽덕회의 주선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서 중국인민군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세는 더 악화되었고 결국 다시 북한에 귀국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무정은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미 해임철직되었던 관계로 간부들이 치료를 받는 병원에 입원 할 수 없었고 인민군 일반병사들이 입원하는 인민군 39호병원에 입원하였고 1952년 10월에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습니다.
무정 장군의 죽음은 곧 북조선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하였습니다. 그가 해임철직되면서 그가 주축이었던 중국공산당 계렬의 연안파는 1956년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숙청과정에서 정치권력 경쟁구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에서 반일독립운동에 공헌한 무정 장군의 역할과 중국공산당과 홍군에서 그가 활약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선인민군 육군대장과 민족보위상이 추서되었고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되었으며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의 정치적인 적수로 간주하고 구실을 붙여 숙청했지만 김일성은 그의 업적마저 묵살해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의 딸 등연려 씨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해외무역총공사 종합업무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정 장군이 중국 홍군에서 포병사령관으로 활약하였던 1938년 에 산하 포부대의 정치위원이었던 중국인 여성 등기와 결혼하여 출생한 1남1여 자녀 중의 맏딸(장녀)입니다. 처음 무정 장군의 딸 등연려의 이름은 무연려였는데 이 이름은 최용건이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무정 장군이 해방 후 귀국하면서 이혼한 뒤 무연려는 어머니 성을 따라 등연려라고 개명하였습니다.
이렇듯 연안파의 대표인물로 잘 알려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 포병연대 사령관이었고 해방 후 북한에서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김일성과 권력암투를 벌릴 정도로 유명했던 무정 장군의 생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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