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올해 8월 15일이면 남과 북이 분단된 지 만 77년이 됩니다. 한반도를 김씨 왕조의 통치아래 두고 온 겨레를 저들의 노예로 부리려는, 현대판 봉건왕조 독재국가인 북한은 대남통일전략의 일환으로 무고한 남북한 주민들을 희생하시키는 가슴 아픈 도발을 계속 일으켜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남통일전략 실현을 위해 분단 이후 3,000회 이상에 달했던, 북한당국이 저지른 도발행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북한의 대남도발은 그 유형과 강도가 다양하였고 미리 예견된 도발도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도발도 많았습니다. 이를 통틀어 가장 큰 도발은 6.25남침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이후에도 약 2,015건에 달하는 재래식 국지도발과 70건 이상의 핵ㆍ미사일 도발을 여전히 강행하고 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의 도발 유형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통한 침투와 테러, 납치, 핵실험, 미사일 발사 시험 등 다양하였고 빈도도 시기에 따라 변화하곤 하였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주로 ‘침투’와 ‘테러’의 행태로, 한국사회를 무력화시키고 내부에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역량을 강화하여 한국 자체 내에서 소위 ‘남조선혁명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가 주도한 냉전시기 도발을 분석해보면 국지도발건수 1,717건 중에 침투 1,476건(86%), 도발 223건(13%), 테러 18건(1%)으로, 침투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던 구소련과 동독,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등 많은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복귀하였지만 이와 반대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국가붕괴위기에 처한 북한당국은 대남전략을 체제유지를 위한 생존전략으로 이용하였습니다.
탈 냉전 이후 북한의 대남 국지도발 298건 중 83%에 해당하는 246건이 ‘도발’이었습니다. 핵ㆍ미사일 관련해서도 71건 모두가 ‘도발’의 행태로 나타났습니다.
위에서 말한 국지도발이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에서 정의한 용어로, 일정한 한정된 지역에서 행해지는 도발 또는 그러한 행동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리고 간첩들을 한국에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간접침략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여기에 최근에는 인터넷상으로 한국의 안보를 해치는 사이버테러까지 감행하면서 남북한 간의 긴장상태는 해소될 날이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 같은 대남 도발을 “한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폭력행위”라고 강조하면서, “전쟁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폭력행위라고 본다면 북한의 대남도발은 평화적시기에 북한의 대남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6.25남침전쟁 이후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강행한 북한의 대남도발들에 대해 전쟁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전쟁의 본질적 요소와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지난 전쟁들과 비교해보면 한반도는 북한에 의해 지속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과 대북전문가들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연구함에 있어 해방 이후부터 6.25남침전쟁이 정전협정으로 휴전이 시작된 시기와 전후부터 구소련 등 동유럽 국가들이 붕괴된 시점인 1990년대 초까지, 그리고 냉전이 종식되고 탈냉전이 시작된 1990년대 초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에 힘을 얻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서울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전쟁을 통해 전 조선을 자기의 손안에 넣어 공산독재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유엔군의 개입으로 결국 전쟁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391만 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6.25남침전쟁의 후과는 지금도 남아있고 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은 세기와 세기를 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대남도발을 통해 북한의 무고한 주민들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김씨일가의 현대판 봉건왕족을 위해 희생되었고 한국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겨레를 마구 희생시킨 김일성은 유엔군의 전쟁참여로 더 이상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대남전략을 간첩들을 대대적으로 양성하여 한국사회를 붕괴시키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간첩사건으로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활동한 박정호 간첩사건, 1953년 정국은 간첩사건, 1954년 8월 풍세면 무장간첩 사건, 1957년 김정제 간첩 사건과 박상혁 간첩 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전후에 한국의 민간인 어선들을 납치하는 도발행위도 서슴없이 감행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어선 납북사건으로는 1955년 5월 대성호 납북 사건, 1958년 창랑호 납북 사건, 1964년 3월 어선 보승2호 납북 사건, 1965년 서해 함박도 어민 납북사건, 같은 해 11월 어선 명덕호 납북 사건, 1966년 어선 길용호 납북 사건 등입니다.
북한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무장한 군인들을 휴전선 넘어 한국 내에 파견해 무장충돌을 일으켜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제2의 6.25남침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종합된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북한의 도발로 전사한 한국 군인은 약 300여 명, 미군은 40여 명, 북한군은 400여 명에 달합니다.
당시 감행한 북한군의 도발행위의 대표적인 사례가 1967년 1월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이며같은 해 4월에만도 중부전선 교전,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 사건,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 사건, 미군막사 폭파 사건, 5월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연평도 근해 어선 포격 사건 등입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북한은 대남도발을 끊임없이 일으켰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1971년 1월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4월 서독 대한민국대사관 직원 유성근 일가족 납북사건,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 1972년 어선 오대양호 납북사건, 1973년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 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76년 8월 18일에 있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에 이어 1980년대 테러를 위주로 감행한 북한의 대남도발은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으로 전 세계를 아연실색케 했죠.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여객기 보잉 707기가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경제발전과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에 밀려난 북한은 핵과 미사일, 사이버 테러에 매달리면서 김씨왕조 독재국가 유지에 광분하고 있지만 정보화시대에 북한에 유입된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북한사회의 반인민성은 날이 갈수록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은 3대 세습 북한의 붕괴는 정의를 향한 역사의 진리대로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 시간에 걸쳐 시기적으로 강행되었던 북한의 도발양상을 폭로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