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숙청정치-고당 조만식 선생 숙청(1)

1945년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 선생. 그 왼편이 레베데프 소장.
1945년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 선생. 그 왼편이 레베데프 소장.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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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청취자 여러분들도 혁명역사 수업시간이나 혁명영화들에서 나오곤 하였던 조만식 선생에 대해 반당반혁명종파분자였다는 것만 들어보았을 뿐 과연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숙청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조선사회민주당 당수였고 반동으로 처형되었다고만 혁명역사 수업시간에 배워주어 그렇게만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은 김일성보다도 29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온건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오늘부터 두 번에 걸쳐 해방이 되자마자 평양에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던 조만식선생의 애국활동과 억울하게 숙청된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오늘은 첫 시간으로 조만식 선생이 태어난 가정환경과 그가 해방 전에 활동한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1883년 2월 1일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경학은 평안도 일대에서 쌀 도매업을 하던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다녔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5살 나던 1897년부터는 포목상과 지물상을 하면서 재산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22살 나던 1904년에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영화관 맞은편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 자리에 있었던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회 예배당에 들어갔던 그는 1,500여명이 넘는 성도들이 함께 찬양가를 부르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민족지도자인 도산 안창호선생의 연설을 들으면서 실력배양이 한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확신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하였고 1906년에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유학기간에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인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인도민족해방운동을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실천해보려고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도쿄유학 중에 치욕스런 한일합방인 경술극치를 접하고 민족독립을 위한 법적 지식을 강구하면서 일본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일본 기독교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이국땅에서 서로 분열되어 있던 유학생들과 재일조선인들을 민족해방운동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명치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 3월에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에서 교원(교사)으로 근무하였으며 1915년에는 교장으로 승급(승진)하기도 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교장직을 사직하고 조선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경찰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 중국 상해로 망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평안남도 강동군일대에서 일본 헌병대의 추격으로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석방된 이후에 다시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되었다가 교장으로 취임되었으며 1921년에는 평양 YMCA청년회 총무로,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YMCA는 기독교청년연합회의 약칭이며 전 세계적인 기독교 청년단체입니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기독교청년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조직은 물론 상업, 공업, 교육, 여성, 청년 등 다양한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데 모든 정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 1927년에는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여 신간회 평양지회 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애국활동에서 특이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조선물산장려회입니다. 그가 1922년에 조직한 조선물산장려회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정책에 맞서 전개하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을 위한 조직이었습니다. 북한정권이 말하는 ‘수입병’ 반대운동을 그 당시에 조직한 셈입니다.

‘국산품 애용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운동을 조직한 조만식 선생은 당시 구호를 내놓았는데 그 구호 내용은 ‘조선사람은 조선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구호를 실천하기 위한 강령으로는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을 이용하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였습니다.

이 국산품 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일본 기업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조선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인천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조만식 선생은 1932년에 서울에 있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 협조요청을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반일운동에 앞장섰던 조만식선생은 일제의 눈에 든 가시와 마찬가지였고 결국 9개월 만에 조선일보사 사장직을 그만두고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만주에서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독립군들을 도와 군자금마련에도 앞장섰습니다. 당시 그가 조선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었던 것도 독립군 군자금 30만원을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일제의 조선침략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1932년에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웠던 민족의 영웅인 을지문덕 장군의 묘소를 잘 모시기 위한 조직인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해방전에 평양에서 자선사업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칭찬할 정도로 유명한 백선행 선생이 1933년에 사망하자 그는 평양시민들을 장례행사에 참가하도록 조직지도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평양시민들의 유일한 공공모임장소였던 백선행기념관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워 평양시민들의 반일애국운동을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1928년에 평양시 중구역 대동강변의 련광정 옆에 건립된 '백선행기념관'을 관리해오고 있습니다. 백선행기념관에는 당시의 백씨선행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북한당국은 그 옆에 화강석 비석을 새로 세우고 여기에 이 비석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창덕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들에 많은 토지와 자금을 기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문없이 돌봐준 백선행의 덕행을 길이 전하기 위해 창덕학교 교직원들과 학부형들을 비롯한 이곳 인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고 씌어 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투쟁에도 앞장섰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모든 조선사람들이 일본식의 성씨를 쓰고 이름도 고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일제는 창씨개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찍어 경찰이 요시찰인으로 간주하였고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사무도 창씨개명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하도록 했으며 취업도 제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학교 입학과 진학을 못하게 하였고 학교들에서 욕설과 구타,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노무·징용 대상자로 우선 지명하도록 하였고 창씨개명으로 되어 있지 않은 소포나 편지도 발송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해방운동가들은 필사의 각오로 창씨개명운동을 거부해 나섰던 것입니다.

일제는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조만식선생을 어떻게 하나 고립시키기 위한 계책을 꾸몄습니다. 일제는 1943년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조만식 선생에게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요청하였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는 달콤한 말로 민심을 회유해 보려던 조선침략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을 거절하였고 지원병제를 반대하자 1943년 11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도병 지원 기사가 실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김일성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된 조만식선생은 북한정권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전 민족해방을 위한 반일애국활동에 모든 정력을 다 바친 순수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해방후 조만식선생의 활동과 김일성이 왜 조만식선생을 숙청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숙청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