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7차 당대회에서 휘황한 설계도를 내놓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김정은이 구체적인 전망도 없는 5개년 계획이라는 걸 내놓았습니다. 5개년 계획이 인민생활향상에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결국 이번 당 대회는 김정은을 노동당위원장이라고 포장해 선대 독재자들인 김일성과 김정일 같은 수위의 진열대에 끌어 올린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단순히 김정은의 우상화를 위해 7차 당 대회라는 요란한 행사를 조직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당 대회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 5명과 후보위원 19명을 선출해 김정은 하수인들의 면모가 낱낱이 공개되었습니다. 앞으로 장성택이나 현영철처럼 어느 순간에 숙청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김정은 하수인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과거부터 북한에서 고위간부들에 대한 숙청방법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그중 가장 흔한 수법은 교통사고로 위장한 의문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 정권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위 간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당시 '동갑'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실권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원인모를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간부들 중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신상균부장도 있었습니다.
1980년 10월에 있었던 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됐습니다. 비록 후계자의 지위는 차지했지만 1980년대 초까지 김정일은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유일적인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김정일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떠들며 김일성의 측근들을 하나 둘씩 숙청하는 너절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김정일에게 첫 희생양이 된 인물이 김일성의 금고지기였던 신상균 박사였습니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는 크게 세 분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1경제는 정무원(내각) 산하 기관들이었고 제2경제는 군수공업 산하 기관과 연구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3경제는 김일성 일가를 위한 비밀경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의 모든 경제지표들은 단순히 내각 산하 매 기관기업소, 연구소들인 제1경제에만 한정돼 있을 뿐 군수공업인 제2경제나 김씨 일가의 생활보장을 위한 제3경제 분야는 모든 비용과 생산품들이 일체 비밀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북한에서 제3경제로 꼽히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는 전국각지에 8호, 9호작업반들과 룡성특수식료공장, 대성담배공장, 태평술공장 등 북한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생필품 생산기지와 식료품 생산시설, 농장과 목장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정치행사는 물론 김정일이 밤마다 즐기던 비밀파티에 사용되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당시까지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가 맡았습니다. 김정일이 어떤 행사를 치르려 해도 신상균에게 자금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상균은 김일성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면서도 김정일의 요구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제대로 들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크게 분노했지만 그렇다 하여 김일성이 '동갑'이라 부르며 신임하는 신상균을 무작정 제거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무리지만 신상균을 숙청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통사고를 택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위장한 고위간부들의 숙청은 주변 가족이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말썽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1985년 신상균 부장은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지방을 다녀오던 도중 뜻밖의 자동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국가보위부와 호위총국이 즉각 조사를 시작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운전기사의 실수로 일단락을 지으면서 사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간부들은 쉽게 의문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계획과장이 신상균 부장에게 김정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직통전화를 개설하자고 제기 했을 만큼 주변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신상균 부장이 어떤 과정에서 어떻게 교통사고를 당했는지는 지금까지 북한에서 최고의 비밀로 취급돼 어떤 고위간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상균 부장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기간 김정일은 기초과학원을 빼앗아 냈습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에서도 제일 알짜배기라 불리던 기초과학원을 조직지도부 5과에 소속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만수무강연구소의 전신인 기초과학연구원은 신상균 부장이 직접 계획하고 일으킨 조직으로 남다른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로 6개월간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기초과학연구원을 빼앗긴 사실을 알게 된 신상균 부장은 김정일의 세력이 이미 김일성을 능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초과학원을 도로 찾으려던 생각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던 신상균 부장의 욕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신상균 부장은 기초과학연구원을 대신해 새로 만청산연구원과 백두산제약공장을 신설하자는 제의서를 김일성에게 올렸습니다.
신상균 부장의 교통사고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던 김일성은 만청산연구원과 백두산제약공장 신설 제의서에 토를 달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교통사고 후과로 10년도 넘게 다리도 잘 못 쓰고 고달픈 악몽에 시달리던 신상균 부장은 1997년에 사망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85년 여름에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김치구 부부장과 이화영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노명근 당 재정경리부 부장도 김정일이 부른 연회석에 참가했다가 밤늦게 승용차로 귀가하던 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수와 김치구 부부장, 이화영 제1부부장은 사망했고 노명근 재정경리 부장은 오래 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외교부 이종목 제1부부장도 역시 밤에 차를 타고 귀가하다 운전수와 함께 교통사고로 즉사했습니다.
1987년에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새벽에 혼자 차를 끌고 가다가 가로등을 들이 받고 중태에 빠졌다가 목숨을 건졌는데 이 사건은 술에 만취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일각에서는 차 정비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일었습니다.
고위 간부들의 승용차들은 모두 노동당 재정경리부에서 담당하고 관리하였고 담당 운전수들도 재정 경리부에서 선발됐습니다. 그래서인지 1985년부터 87년 사이에 중앙당 재정경리부 운수과는 '사망과'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이후로도 노동당 비서들인 김용순과 연형묵을 비롯한 많은 간부들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사망한 간부들의 면면을 따져보면 두말할 필요가 없이 모두 김일성의 손발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됐던 이후, 김정일의 오른팔이라고 하던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지난해 12월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의 교통사고는 1985년 신상균 부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교통사고 사망사건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이번 당 대회에서 드러난 김정은의 측근들 중 앞으로 또 누가 어떤 교통사고로 위장된 숙청의 죽음을 맞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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