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940년대 대남도발과 6.25남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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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해방 이후 1945년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5년 동안 북한이 감행한 대남도발과 공산적화통일을 달성하려고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의 발발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6년간의 일제강점으로 식민지 노예의 삶을 살았던 우리 겨레에게는 미국의 핵무기 사용으로 일본이 완전 항복하면서 해방이 되었으나 그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구소련과 미국에 의해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체제경쟁과 남북교전이 이어졌고 이에 38도 군사분계선 일대는 어느 하루도 평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남한과 지리적으로 멀리 있는 미국보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으로 북한은 빠르게 무력을 증강할 수 있었고 1948년 2월 8일에 북한은 조선인민군을 창건하고 소위 ‘남조선 해방’ 운운하면서 끊임없는 국지전에 매달렸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북한의 끊임없는 국지전에 대해 북한의 소련파와 중국공산당 소속의 연안파, 소련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 출신들이 군부대 사단장, 군단장이 되면서 자기의 세력을 위시하려는 일련의 무력시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한 국지전의 다른 한 이유로, 새로 창건된 신생 조선인민군이 자기의 군사교리와 전투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부단한 전투시도를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당시 북한군의 대남도발이 하도 많았기에 언론매체들에서 다루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북한의 대남도발은 군사적인 도발로 이어진 국지전,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한국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고 국가안보를 파괴하려는 간첩사건 외에도 전기공급을 차단하는 단전도발 등 다양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북한이 취한 단전도발행위에 대해 청취자 여러분들은 금시초문일거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북한에서 절대로 가르쳐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의 북쪽지역은 공업지대로, 남쪽지역은 농산물 생산지대로 구분하여 식민지 약탈을 위한 경제적인 투자를 했습니다. 함흥과 청진지구가 화학공업과 전력공업 생산지대가 되었고 전력생산을 위해 압록강과 장진강, 허천강, 독로강 등 북한 북부지역의 강들에 수력발전소들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발전소 건설을 주관한 일본기업들로는 주식회사들인 원산수력전기, 장진강수력전기, 조선수력전기 등이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발전소들에서 생산된 전기는 전기요금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으로 공급되었고 한국의 공업생산설비들과 민가들에도 북한의 전기가 공급되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 5월 10일, 김일성의 지시로 낮 12시부터 송전을 중단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단전사건을 전문가들은 대남도발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력생산의 90%이상을 차지하던 북한이 이러한 단전으로 한국 내에서 주민들의 반정부활동을 벌려 제도 붕괴를 꾀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유일하게 한국지역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에 건설한 영월화력발전소마저 파괴하려고 그해 11월 26일 남파 공작원들을 파견했지만 폭파기도는 실패합니다. 한국군에 의해 영월화력발전소 폭파가 실패하자 북한군은 12월 2일 서부전선에서 일방적인 도발로 국지전을 감행하였습니다. 1949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군사적인 도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2월 6일에 개성 송악산 지역에서 감행한 군사도발에 이어 5월 4일에는 개성시 바로 근처에 까지 진입해 박격포로 개성시내에 맹폭격을 가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전쟁기념관에는 당시 개성군사도발로 위기에 처했을 때 송악산에 가설했던 인민군 화점을 육탄으로 막은 10명의 한국군 용사들의 공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육탄 10용사 부조상’이 있습니다. 당시 북한군의 군사도발로 희생된 서부덕,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등 한국 용사들은 20대 초반의 청춘들이었습니다.

한반도를 현대판 봉건왕조인 김씨왕조 독재국가로 만들려는 야망으로 김일성은 1949년 6월 12일에는 포천전투를, 5월 21일부터 그해 11월 15일까지 사이에는 옹진 은파산 전투를 감행했으며 7월 4일에는 강원도 양양군사도발을 감행하였습니다.

1949년 2월 미군이 ‘북한군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군사적 도발수위를 더욱 높였습니다. 1949년 8월 6일부터 2주 동안 인민군의 군사도발로 벌어진 ‘춘천 682고지전투’도 북한 대남전략으로 일어났던 국지전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대남통전부는 공작원들을 통한 대남도발도 거리낌 없이 감행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직접적인 지시로 중국공산당 출신인 성시백이 1947년 5월에 서울에 잠입하여 1948년 2월 남북교역이 금지될 때까지 무려 56차에 걸려 명태와 카바이드 등 총액 1억 원이 넘는 물자를 북한에서 넘겨받아 정치공작자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지령으로 ‘남반부 정치위원회’를 결성할 임무를 받은 성시백은 북한 노동당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인 ‘조선상사’로부터 6,100 달러를 반입한 데 이어 1949년 12월부터는 밀수선인 금비라호(金比羅號)로 중국과 밀무역을 하여 2만 달러와 수백만 원의 견직물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3월에도 1만 2000 달러를 들여오는 등 총액 3만 9000 달러의 공작금을 마련하여 한국군의 기밀을 탐지하고는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려는 김일성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성시백 간첩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한국군의 정보를 북한에 제공한 ‘김수임 간첩사건’도 대표적인 대북도발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1년 3월 1일에 경기도 연천군에서 태어난 김수임은 어린 시절을 개성에서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미국인 독신여성의 수양딸이 되어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 김수임은 공산주의자인 이강국의 영향을 받아 이강국 월북협조, 북한에서 제조한 위조지폐 서울운반,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중업을 월북시키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결국 간첩으로 판명되어 1950년 6월 28일 사형 당하였습니다.

1949년에 김일성은 당시 남로당 당수 출신인 박헌영을 이끌고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 남침전쟁을 승인받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한 남침전쟁이었다는 증거는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한국정부에 전해진 비밀정보자료들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45년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이 완전항복하게 되고 결국 한반도는 해방되었고 이를 잘 아는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전쟁시도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1949년에 한국에서 철수하고 박헌영과 한국 내 간첩들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 있는 수십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호응하여 순식간에 ‘남조선 해방’이 달성될 것이라는 주장을 참고로 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은 김일성의 전쟁승인을 허락하게 되고 결국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가슴 아픈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194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을 설명해드렸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전 한반도에 대한 김씨왕조의 독재를 위한 195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 설명해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